초이스
[초이스]평범하기
최현정, 2002
감독의 대학 동기이기도 한 친구 주용은 “남자도 여자도 아니지만, 남자 화장실에 가는 인간이고, 가슴달린 남자”이다. 스스로를 양성구유자라고 밝히는 이 친구는 자신을 영화로 찍어달라하고, 영화는 주용과 룸메로 지내면서 그의 일상과 인터뷰를 따라가며 시작된다. 여학생들 사이에서 자신의 성정체성이 탄로날까 두려움에 떨어야 했던 중학교 시절이나, 남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숱한 상처를 겪었을 주용의 이야기를 따라가다보면 <평범하기>는 그저 “평범하게 살고 싶은” 성소수자에 대한 다큐로 보인다. 그런데 한 시간 남짓한 러닝타임의 영화가 시작하고 절반 즈음을 넘어서면서 이야기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된다.
주용의 룸메이트로 지내던 감독이 그 집을 나와 이사를 하고, 두 사람의 관계에 보이지 않는 변화가 생긴다. 2년 여간의 촬영본을 편집하던 감독은 주용의 어린 시절 사진을 보고, 사진 속 주용의 모습이 자신이 상상했던 것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사진에 기록된 주용의 모습과 카메라 앞에서 고백한 주용의 어린 시절의 모습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진 속 주용은 영락없는 남자 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고, 감독과 마찬가지로 영화를 보는 관객도 주용이 거짓말을 한 것인지, 만약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혹은 이 영화 전체가 픽션은 아닌지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한다. 감독 역시 “주용이가 소재를 제공하고, 내가 이야기를 덧붙이고 있는 극영화를 만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혼란스러움과 실망을 느낀 감독은 주용에게 말을 안 한 것이 있는지, 촬영된 부분 중 사실이 아닌 것이 있는지 추궁하고, 카메라 앞에 앉은 두 사람의 대화 속에서 감정의 골은 깊어진다. 이때부터 <평범하기>는 성소수자라는 한 인물을 떠나 진실과 거짓, 사실과 허구, 실재와 상상, 주관적 기억과 객관적 기록, 다큐와 픽션 사이의 경계가 허물어진 어딘가에 위치한다.
감독은 양성구유자인 주용에서, 소수인권자인 주용이로, 그리고 다시 내 친구 주용이에 대한 영화로 편집하는 것으로 이 작업을 마무리한다. 흥미로운 부분은 영화가 주용이의 내레이션으로 끝맺는다는 것이다. 이 다큐를 시작한지 4년이 지나 영화가 완성될 즈음 쓰여진 주용의 내레이션에서 그는 “이제껏 누군가 나를 이해해줄 거라 믿었던 적은 없다. … 나는 잊혀지고 싶다. 나는 최대한 평범해지고 싶다”고 말한다. 영화는 시간의 흐름대로 감독이 주용이라는 친구를 만나 그를 알게되고, 그를 이해하게 되었다가, 다시 멀어지고, 또 얼마만큼의 거리에서 친구로 그를 이해하게 되는 일련의 시간을 일기처럼 써내려갔다. 하지만 마지막 주용의 내레이션은 이 영화를 처음부터 다시 볼 것을 요구하는 것처럼 들렸다. 마치 도돌이표처럼 <평범하기>는 감독의 시점이 아닌 주용의 시점으로 다시 영화를 보라고 요구하는 것 같다.
영화는 별다른 장치 없이 시간순으로 편집되었고, 마치 일기를 쓰듯 감독은 촬영이 진행된 시간을 화면에 표시해두었다. 대신 주용의 인터뷰를 보충해주듯이, 주용의 어릴 적 흑백사진을 자신의 사진과 함께 보여주는데,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관객인 우리는 이 사진 속 주용의 모습이 인터뷰에서 스스로 지어낸(혹은 그렇게 믿고 있을지도 모를) 주용의 모습과는 다르다는 것을 쉽게 알아챌 수 없다. 무엇보다 가장 내밀하고 꺼내어놓기 어려운 자신의 고통과 상처를 카메라 앞에서 꺼내어놓는 주용의 ‘고백’에서 진정성이나 진심, 공감 대신 의구심이나 의혹을 갖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전반부는 감독이 주용과 그의 주변을 촬영하거나 가끔은 주용이 카메라를 들고 감독을 찍는다. 그러니까 전반부는 감독이 보는 주용이거나, 주용이 바라보는 감독의 모습이 담겨있다. 하지만 편집실에 앉아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장면(여기에서부터 감독 자신도, 관객도 주용의 이야기가 어쩌면 거짓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하게 되는)은 제3의 손에 카메라가 들려져 있다. 이때부터는 두 사람이 바라보는 서로의 모습보다는 두 사람의 관계를 제3의 시각으로 보여주는 것이 중요해진다.
그렇게 다시 영화의 처음으로 돌아가면 <평범하기>는 감독의 감독이 바라보는 주용, 그리고 주용이 바라보는 감독 등 누군가가 바라보는 누군가의 이야기로 읽힌다. 어떻게 보면 이 이야기는 상대방에게 이해받고 싶었던 주용의 고백이나 러브레터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것은 카메라를 향해 이야기하는 주용의 인터뷰가 무엇이 사실이고 사실이 아닌가라는 경계를 흔들어버리기 때문이고, 영화 역시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를 밝혀내기보다는 그 경계의 모호함, 그 경계의 불명확함에 더 방점을 찍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을 ‘기록’한(했다고 믿어지는) ‘다큐’ 안에 담긴 ‘실재’하는 인물을 통해 성수자의 인권에 대해 생각하고, 차이와 차별에 대해 생각해보자고 말하는 대신 <평범하기>는 좀더 어려운 질문을 던지는 것 같다. 과연 우리가 누군가/무언가를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가능한가? 그리고 우리 자신이 ‘이야기된 자기’를 벗어나는 건 가능한 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