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
[초이스]환호성
정재훈 2011
<환호성>은 사계절의 낮과 밤을 오로지 노동으로만 보내는 한 남자의 초상이다. 일찍이 플라톤은 『국가』에서, 노동의 시간만 허락받은 철의 종족인 장인들의 질서와, 밤 시간에 사유하거나 회의를 하며 폴리스에서의 정치 활동에 전념할 수 있는 금의 종족들, 즉 통치자의 질서를 구분했다. 다음날 다시 일터로 가기 위해 쌓인 피로를 씻어야 하는 밤. <환호성>의 젊은 남자에게 허락되는 여가도, 철의 종족의 경우처럼, 곤한 잠과 담배 한 대뿐이다. 감독도 자신의 주인공에게 굳이 사유의 시간을 주려 하지 않는다. 연출자는 한술 더 떠, 이 남자를 철저한 고대 노동자의 형상으로, 공동체에 기여하는 ‘상징적 황금’에의 욕구를 갖지 못한 채 자신의 삶을 이루는 시간을 화폐로 교환하는 데만 열중하는 이로 그린다.
그러나 그는 온전한 사람이므로, ‘인간적 개체성’을 지닐 수밖에 없다. 영화는, 젊은 남자의 ‘개체성’이 공동체 안에서 어떻게 ‘정치적’으로 ‘분할’되는지 그의 몸을 조각내며 보여준다. <환호성>이 톺아가는 이미지들의 사정은, 우연찮게 프루스트와 플로베르의 정치성을 분석하는 랑시에르의 어떤 궤도와 흡사하다. “특별한 표현들과 자세들을 규정하는, 영혼에 의해 움직이는 단일한 신체로 정의되는 ‘인간적’ 개체성은 원자들의 무차별적 혼합으로부터 파생하는 전(前)인간적 개체성으로 대체된다. 풀잎, 먼지 소용돌이, 손톱의 광채, 빛줄기 등의 만남은 대의적 전통에서 일상적 삶과 개인들의 감정과 의견으로 표현됐던 것을 대신한다.” (『문학의 정치』)
고통스레 잠에서 깨어나 말 없는 노동으로 점철된 일과를 보내는 프롤레타리아로 젊은 남자의 형상을 고정하려는 카메라는, 남자의 몸과 잠의 이미지를 훔친다. 드물고 짧은 그의 산책길은 노동이 끊어 버리고, 일만 하는 그의 고립된 신체는 살덩이와 같아 정치의 장인 공동체와 불화할 도리밖에 없다. 침입자인 감독의 시선에 상징적 황금을 위한 수고를 온전히 맡겨 버린 젊은 노동자는 종내 소음만 만들어 낸다. 그러므로 이 영화의 사운드트랙이 노이즈 음악인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연출자가 훔쳐낸 이미지는, 침묵 속에 그를 지켜보던 우리 모두의 이데아가 된다. 잠만으로 살 수 없다 믿는 우리는, 이 이데아의 허기를 메우고 싶어서 남자의 의식이라는 시뮬라크르를 갈구하게 된다. 황금이 함께하는 그의 진정한 숙면을 고대하는 우리의 번뜩이는 시선은 이 시뮬라크르를 빛나게 하지만, 여전한 허기는 이데아에 구멍을 낸다. 영화는 놀랍게도, 익숙한 표상 체계를 자유로이 이탈해, 이 구멍과 빛들을 하늘의 별처럼 실제로 보여준다. 이 장면들은, 영화와 시의 재현 체계가 그리 멀지 않다는 것을 증명한다.
다시 랑시에르에 기대자면, “‘금지된 높이, 낙뢰의 높이’에서 하찮은 것, 무상, 시뮬라크르의 빛남이라는 인간 본연의 빛남과 자신을 공상적 동물로 여기는 동물의 위대함을 공동체의 축제에 투사하고, 말 없는 영원의 깊은 골짜기 속에서 자신의 고유한 주거를 정돈하는 것이 공상적 소명의식의 신성화를 통해 시작됨”을 아는 자가 시인이다. 철의 종족과 금의 종족을 구분했던 플라톤은, 철인(哲人)이 통치하는 국가에서 시인을 추방해야 한다고 여겼다. 당대의 시인인 감독과 그의 카메라는 현대의 표상과 그것이 만들어내는 신화도 거부하기에, ‘물질’로만 불리는 뭇 존재들에서도 빛줄기를 찾아낸다. 이 새롭고 평등한 세계 속에서, “있어야 할 곳”에 거하는 젊은 남자. 그의 현전은 “인간적 신성의 거처 속에서 어떤 인간 동물의 자리를 입증한다”. 이 한 마리 동물의 존엄함은 그의 등에 날개를 돋게 한다. 그 현전은 실로 눈부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