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초이스]로맨스 조

이광국, 2011

[초이스]로맨스 조 대표 이미지

: 누군가 밤새워 한 이야기는 어떤 힘이 있을 것만 같다.

허름한 모텔에서 한 감독이 커피를 주문한다. 시나리오 쓰기는 뒷전인 감독은 다방여종업원에게 자신이 ‘괜찮은 남자’를 연출한 감독이라고 으스댄다. 그러자 그녀는 밤새 그의 마음을 혹하게 할 만한 로맨스 조라는 인물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한다. <로맨스 조>는 현실과 이야기가 뒤섞인 채, 서로의 경계를 허무는 기이한 영화다. 누군가 어떤 사건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허구적일 수밖에 없다. 모두에게 각자의 진실만 있을 뿐 전체를 가로지르는 하나의 진실은 없기 때문이다. 사건이 언어화되는 순간, 허구와 공모할 수밖에 없다는 것, 이것이 진술된 사건, 이야기의 특성이다.

이광국 감독의 <로맨스 조>는 스스로 이야기임을 지시하면서도, 그 매혹에 빠지는 영화다. 이 영화는 이야기임을 매 순간 선언하면서 자신의 환상적 구조를 드러내지만, 다른 한편 이야기에 대한 끝없는 욕망은 <로맨스 조>를 내밀하게 작동시킨다. 그것은 관객과 영화 사이에서만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 내의 작동방식(특히, 인물들 간의 관계)도 동일하다. 이 영화는 시공간의 논리적 개연성이 떨어진다. 심지어 말하는 그/그녀가 도저히 알 수 없는 것들까지 이야기로 구성한다. 그것은 이야기하는 자의 욕망이자, 이야기를 듣고자 하는 욕망이다. <로맨스 조>는 이야기들로 향하는 욕망들을 모두 흡수하고, 다른 질서 속으로 다시 뱉어낸다. 이야기는 욕망을 따라 증식하고, 파괴된 현실의 시공간에서 새로운 생명을 부과한다.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이야기들이 시공간의 질서에 구멍을 내고, 이야기에 대한 욕망들은 그러한 균열들을 강력하게 봉합한다. <로맨스 조>는 이야기의 속성 혹은 이야기의 능력에 대한 고민들을 장면들의 구조적 치밀함으로 보여준다. 영화가 한 시간이 넘어갈 무렵, 엄마를 찾기 위해 다방으로 찾아온 소년(초희의 아들)은 이렇게 말한다. “엄마 아는 사람이 있으면 엄마 이야기라도 듣고 싶어서 그래. 이야기 듣다 보면 엄마랑 같이 있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아져. 더 보고 싶긴 하지만, 그러다가 혹시 엄마를 찾을 수도 있잖아.” 이광국 감독은 이야기의 능력이 현실조차도 바꿀 수 있다고 믿는다. 첫 장면에서 등장한 액자 속의 말들, 마치 돈키호테의 ‘말’이 하나가 아니라 복수의 ‘말들’, 그 기사도들의 무모함 속에 담긴 개별적 진실들의 연쇄작용이 <로맨스 조>를 이끈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이야기’가 아니라 ‘이야기들’이다. 복수의 이야기들.

<로맨스 조>가 더욱 놀라운 것은 이 영화의 형식에 흥미로운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런 질문이다. 어떤 이야기(기억)를 뚫고 들어가면 다른 사람의 이야기(기억)로 나올 수 있을까? 혹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기억)와 만날 수 있을까? <로맨스 조>에는 현실과 가장 가까운 곳에 머무는 것처럼 보이는 세 명의 주요한 화자가 있다. 첫 번째는 로맨스 조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다방여종업원 그리고 두 번째는 소년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친구 그리고 마지막으로 로맨스 조의 엄마다. 사실 이 이야기들이 모두 로맨스 조와 정말 관련 있을까라는 의문도 들지만, 그것에 대한 판단은 온전히 관객의 몫이다. 결국, 마지막 장면에서 친구가 경찰로 등장하고 안면 있는 듯 하지만 서로를 몰라보기 때문이다. 어디까지 현실인지, 이야기들의 경계가 어디인지는 각자의 생각에 따르면 될 듯하다.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가 그저 열려 있지는 않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허술하게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것은 누군가의 이야기들이 다른 누군가의 이야기들과 만나면서 이상한 기운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야기들은 어떻게 서로 만나게 되는가. 다방여종업원에게서 시작한 로맨스 조의 이야기는 초희가 자살을 시도하던 장소로 옮겨간다. 로맨스 조는 자신의 손목을 그으려다 초희의 울음소리가 외화면에서 들리자 멈추게 된다. 그리고 즉각적으로 로맨스 조는 자신의 어린 시절의 로맨스 조를 통해 초희의 자살을 경험했던 장소로 돌아간다. 그리고 두 번째 화자인 친구는 소년(초희의 아들)의 이야기를 전하게 되는 데, 그때 다방여종업원이 이야기 속에 재등장하고 소년을 통해 초희의 자살 장소로 이동한다. 각기 다른 곳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드디어 한 곳에서 만나게 되는데 그곳이 바로 초희가 자살을 시도했던 장소다. 첫 번째 화자인 다방여종업원의 이야기와 두 번째 화자인 친구의 이야기가 서로 만나면서, 이 이야기는 누구의 이야기인지 알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세 번째 화자인 로맨스 조의 어머니는 아들의 가출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그것은 로맨스 조의 어머니가 이야기할 수 없는, 어떻게 보면 어머니가 이야기하므로 진실이 담보될 것 같은 느낌을 주지만 결국 그 이야기도 로맨스 조 자신이 아니고는 절대 말할 수 없는 이야기다. 더구나 이 세 가지 서로 다른 방향에서 진행된 이야기들의 끝에는 최종 수신인이자 발화자인 다방여종업원으로 수렴된다. 이야기의 시작과 끝에서 이야기하는 자가 바뀐 것이다. 그리고 뱃전에서 기다리는 어린 로맨스 조와 다음 장면에서 초희의 기다림이 자연스럽게 조우 할 때, 전자의 기억을 불러들인 로맨스 조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와 후자의 기억을 영화 앞에서 이미 상기시켜버린 소년의 엄마에 대한 불가능한 기억과의 만남은 깊은 울림을 준다. 그것은 일종의 불가능한 동시성의 감흥 같은 것이다. 같은 시공간에서 만날 수 없는 영역과 도저히 닿을 수 없는 기억의 영역을 만나게 하는 것이 이야기의 힘이라고 강력히 믿을 때, 그리고 그로 인해 현실의 변형 가능성을 영화로 보여줄 때, 나는 이광국 감독의 이야기를 믿고 싶어진다. 나도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하고 싶어지고, 들어주고 싶은 것이다. 소년이 고동산 모텔에서 다방여종업원을 밖에서 기다리는 장면. 사선으로 트랙킹하던 카메라는 마치 기억의 삼각형의 꼭짓점에 소년이 들어선 것처럼, 소년은 다른 차원(엄마의 기억)으로 건너가는 것이다. 그것은 생각(이야기)으로 가능한 최대의 능력이자, 영화가 보여줄 수 있는 미지의 힘이다.

이광국 감독은 현실과 이야기의 만남을 매끈하게만 연결한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다방여종업원의 옷은 우연히 로맨스 조의 자살 시도를 볼 때와 모텔 밖의 소년과 함께 있을 때가 서로 다르다. 그것은 전자는 다방여종업원의 이야기에 속하고 후자는 친구의 이야기에 속하기 때문이다. 결국, 이야기는 다른 이야기들과 조우할 수 있게 하지만, 어쩌면 불완전함으로 남는 지점에 대해 제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이야기가 현실을 변형시킬 수 있음에 대한 강력한 믿음과 물리적 현실의 충돌에서 발생하는 누빔점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마지막 장면에서 이야기(생각)와 시간의 문제를 동시에 거론하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야기(생각)의 힘을 통해 다른 시간들을 조우하게 하는 것, 그것은 죽음(누빔점)과 관련된 장소에서만 가능해진다. 그리고 그 죽음은 기억을 끊임없이 떠올렸던 이야기들의 가장 치열한 흔적들이 남아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관련 영화인

불러오는 중입니다.

관련 영화글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