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
[초이스]철선공주
1941
21세기 중국은 과거와 달리 경제 대국으로 올라섰다. 소득 수준의 향상에 따라 문화소비도 커졌고 영화시장도 세계적 수준으로 커졌다. 애니메이션 시장과 투자도 어마어마하다. 하지만 인정받을 만한 좋은 작품은 안타깝게도 드물다. 스타일에서도 미국과 일본 것이 혼재되어 방향 없는 정체 모를 것들이 많다. 중국 애니메이션의 뿌리가 있을까 싶은 정도다.
그러나 중국은 현존하는 장편 애니메이션 중 세계 9번째 작품을 내놓았던 애니메이션 강국이었다. 가장 먼저 아시아 애니메이션의 여명을 밝힌 일본을 제치고 아시아 최초로 장편을 선보인 것이다. 이 기록을 보유한 작품이 바로 중국의 첫 장편 애니메이션 <철선공주>다. 완 라이밍과 그의 형제들이 제작을 이끌었다.
해외의 선진문물이 상해를 통해 쏟아져 들어온 1920년대, 미국의 디즈니나 플라이셔 사의 단편 만화영화들도 함께 유입되었다. 당시 중국에서는 애니메이션을 ‘가통(?通)’라 불렀다. 영어 카툰(Cartoon)의 중국식 한자표기다. 중국 사람들은 이 새로운 매체에 매력을 느꼈다. 화가를 꿈꾸던 완 라이밍도 그랬다. 그래서 동생 셋과 작은 방 하나를 빌려 짧은 애니메이션을 실험했다. 그렇게 1926년 <화실대소동>이란 중국 최초의 애니메이션을 발표, 중국 가통 역사의 시작을 알렸다.
<철선공주>는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는 와중에 기획되었다. 완 라이밍은 상해사변을 피해 각지를 떠돌다가 상해로 돌아와 신화연합전업공사에서 장편을 구상한다. 1940년 초 디즈니의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가 중국에서 크게 흥행한 영향이 컸다. 완 라이밍은 중국의 문화가 들어간 작품을 만들고 싶어 했다. 그래서 선택한 이야기가 <서유기>에 나오는 ‘손오공삼차파초선’이다. 화염산을 무대로 손오공 일행과 우마왕의 대결을 그린 부분이다. 무엇보다 철선공주란 여성도 나오니 백설공주와 대비해 동양의 여성미를 보여주기에 적격이라 싶었다.
처음 시도한 장편이다 보니 애니메이터 인력도 턱 없이 부족했고 스케줄도 지연되었다. 그에 따라 제작비도 예상보다 훨씬 늘어났다. 때문에 한동안 제작이 멈추는 위기도 겪었다. 다행히 한 재단의 도움으로 재개해 제작에 착수한 지 18개월 만인 1941년 11월에 마침내 완성, 상해 3대 극장에서 일반 개봉을 하게 된다.
<철선공주>는 로토스코핑 기술에 의한 실사의 움직임을 더해 당시로써는 훌륭한 영상을 선보였다. 때문에 흥행에 크게 성공한 것은 물론, 신문과 방송을 통해 고도 상해 시민들에게 자신감을 북돋았다는 호평까지 받았다. 전시 중의 중국인들에게 자국의 애니메이션은 정신적인 위안을 주었다. 일본이 상해를 점령한 후에도 인기몰이는 이어졌다. 요괴 우마왕의 반사경이 일본을 상징하는 태양이 아니냐는 추측 속에 중국인들은 <철선공주>를 관람하고 항전의식을 고취시켰다.
1942년에는 일본에도 수출되어 상영되었다. 당시 중국이 장편 애니메이션을 먼저 제작했다는 사실에 일본인들은 큰 충격에 빠졌다고 한다. 일본만화의 신 데즈카 오사무가 어린 시절 <철선공주>를 보며 애니메이션 제작을 꿈꿨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렇게 <철선공주>로 중국 장편 애니메이션의 시작은 화려하고 의미도 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