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
[초이스]아버지 없는 삶
김응수, 2012
김응수 감독의 <아버지 없는 삶>의 주인공은 표면적으로는 야마시타 마사코라는 쉰 살의 일본 여성이다. 한국 남자와 결혼해 충주에 사는 한 평범한 일본 여성이 20년 만에 절연했던 아버지를 찾아가는 노정을 담은 이 다큐멘터리에서 흥미로운 것은 이 영화가 실질적으로 야마시타 마사코에 대해 말해주는 것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이 영화는 야마시타 마사코로 시작해 야마시타 마사코로 끝나지만 그녀의 여행 속에서 그녀의 내면은 시종일관 보여지지 않는다. 그녀는 그저 물리적으로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지만, 아버지와의 재회도, 오랜만에 고향에 온 소회도 영화 속에서는 드러나지 않는다. 그녀는 처음부터 내키지 않는 듯 그 여행을 떠났고, 화자이자 감독인 김응수는 그 여행이 그녀에게 주는 의미를 추측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비어있는 상념의 공간을 채우는 것은 1인칭 화자, 그리고 Q라는 가상의 인물이 B라는 인물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의 독백이다.
‘아버지’라는 화두는 야마시타 마사코를 경유하여 화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거대한 하나의 줄기이다. 여기서 흥미롭게도 야마시타 마사코라는 텍스트 위에, 미국 교과서에 실렸다가 한국인에 대한 편향된 시각을 다뤘다는 논쟁에 휩싸인 일제 해방기 북한에서 일본으로 돌아간 한 일본 여성의 수기 ‘요코 이야기’와,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 <만춘>이 겹쳐진다. 이 세 이야기 모두의 공통점은 물론 ‘아버지’라는 존재에 있다. 이 이야기 속의 아버지들은 저마다 다른 모습을 띠고 있다. 야마시타 마사코가 한국인과 결혼한다는 사실에 격분해 그녀와 절연해버렸지만, 그녀의 아들의 존재가 가문의 대를 이을 것이라는 생각에 화해를 청하는 아버지. 마사코가 끝내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던 그의 옆에, 요코가 자신의 험악한 노정 속에서 신화화 된 아버지를 호명한다. 아버지의 칼을 부목 안에 숨겨 갖은 고생 끝에 고향으로 돌아온 요코에게 아버지는 그녀가 돌아가기를 꿈꾸는 과거의 영광, 무엇으로도 해칠 수 없는 광휘에 휩싸인 존재이다. 그렇다면 오즈 야스지로의 <만춘>은 어떠한가. 홀로 남을 아버지를 두고 차마 시집 갈 엄두가 나지 않는 딸에게 아버지는 자신을 위해 인내하고 헌신하며, 자식의 행복을 위해 한 발 물러설 줄 아는 엄숙한 사랑의 결정체이다. 이 세 가지 이야기 속에서 감독은 갖가지 방식 안에서 세워진 ‘독재자’의 신화를 은연 중에 떠올린다. 아버지 없는 삶에 대한 공포, 아버지에 대한 연민, 이 모든 것을 떨치고 아버지 없는 삶을 살고 있는 야마시타 마사코의 무표정한 얼굴을 통해 감독은 아버지의 신화에 대해 지극히 평범하고 사색적인 어조로 반문한다. 마치 한 편의 소설을 읽는 것 같은 기분으로 이 영화의 노정을 따라가다 보면, 지극히 신파적인 구도로 시작되는 이 영화가 의도적으로 신파의 정서를 무너뜨려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사적인 삶이 공적인 질서의 신화와 거미줄처럼 얽혀 있음을, 이 영화는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설파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