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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이스]오목어

김진만, 2012

[초이스]오목어 대표 이미지

국수 면발이 하늘에서 떨어진다. 소면(素?)이라 하던가? 여튼 면발이다. 익지 않은 딱딱한 국수 면. 이들이 촘촘하게 바닥부터 쌓여 올라가더니 이윽고 거대한 캔버스가 된다. 캔버스 앞쪽에서 면들을 누르면 밀려들어간 면들 때문에 홈이 생기고 안쪽으로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다시 캔버스 뒤쪽에서 국수면을 누르면 캔버스 앞쪽에 튀어 나와 평면이 되거나 볼록하게 된다. 이렇게 딱딱한 소면 하나하나를 밀고 당겨서 그림을 그리고 한 장씩 찍어서 움직임을 만든다. 얼핏 ‘핀 스크린 애니메이션’이 떠오르기도 하는 이 작품은 김진만 감독의 단편 애니메이션 <오목어>, Noodle fish 이다. 

물 밖의 세상을 궁금해 하는 작은 물고기 이야기. <오목어>. 물론 ‘오목어’라는 어종은 없다. 그냥 오목하게 들어가 버린 캔버스 그 자체의 특성을 가지고 붙은 제목이자, 이름일 것이다. 그래서 인지 다른 물고기들과 생김새도 다르다. 다른 물고기들은 캔버스의 뒷면에서 밀어서 볼록하게 만든 물고기들, 말하자면 ‘볼록어’들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볼록어들 사이에 홀로 헤엄치는 오목어. 이는 오목어가 고민해 왔던 자신의 정체성의 문제가 도드라지는 지점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국수로 만든 캔버스에서는 볼록한 것들과 오목한 것들의 차이는 그리 심각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평면이라는 양식으로 소멸될 수 있다. 예컨대 국수 면발의 캔버스의 앞쪽에서 면을 밀어 넣어 오목하게 만들면 캔버스의 반대면은 밀려들어간 면에 의해 볼록하게 나오게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오목이’를 만든 국수 캔버스의 반대편에는 ‘오목어’의 볼록한 버전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이 독특한 캔버스는 어쩌면 양면을 가진 거울/유리 같은 매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관객은 캔버스 뒤쪽의 모습을 볼 수 없다. 당연히 우리는 작품 속의 ‘그 오목어가 처한 상황처럼’ 고정된 카메라에 의해 국수/면의 다른 면을 볼 수 없다. 하지만 대신 그곳에는 작가가 있다.

말하자면 <오목어>의 작가는 양립할 수 없는 두 대척점 사이를 유일하게 관통하는 자이다. 그것이 그가 직접 노동을 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이에 감독의 자의식은 작품의 대상이 되는 오브제 그 자체에 대한 탁월한 해석과 통찰로부터 기인하게 된다. 자, 이제 오목어가 궁금해 하는 물 밖의 세상은 어떤 곳일까? 아니면 오목어가 발견해야만 하는 세계의 다른 면은 무엇일까? 그것은 작품의 공간적 테두리를 구성하는 프레임을 벗어나는 방식이자, 고정된 카메라로부터 해방되는 우리들의 시선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오목어의 대척점, 즉 볼록어를 보는 것일 테고, 동시에 각각의 층위를 가로지르며 관통하고 있는 작가의 영역을 보게 하는 것이다. 

결국 작가가 오목어에게 투여한 매체의 정체성, 또는 오목함에 대한 경계 짓기/무너뜨리기는 작가 스스로에 대한 물음이기도 하다. 이것이 작품의 마지막에 이르러 사건의 프레임 외부가 노출되는 이유일 것이다. 본격적인 탈 프레임, 데까드라주(decadrage)는 감독과 매체, 오브제와 ‘오목어’ 자신의 정체성들 사이의 탄탄한 균열들을 무너뜨리며 이들 모두의 아이러니를 불러 모으는 작업이었다. 그리고 여기에서 김진만 감독은 비로소 아티스트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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