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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이스]..에, 묻다

박준범, 2003

[초이스]..에, 묻다 대표 이미지

<도다리-리덕스>(2011)를 만든 박준범의 세 번째 단편인 <..에, 묻다>는 짧은 러닝타임, 한 마디만 등장하는 대사, 별다른 사건도 일어나지 않지만 단편영화만이 표현할 수 있는 특별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16mm 흑백 필름의 질감은 이 영화의 담백한 서사, 배우의 섬세한 연기와 어우러지면서 정서적인 감응을 불러일으킨다. 제목에 사용된 말줄임표와 쉼표는 이 영화의 미니멀한 형식과 속내를 쉽게 드러내지 않는 어조에 담긴 무드를 포함하는 역할을 한다. 

한 남자가 버스에 타서 음악을 듣고 있을 때, 옆자리에 앉은 여자가 잠에 빠져들면서 남자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다. 곧이어 잠에서 깨어 급하게 내리는 여자 때문에 남자의 옷소매에서 단추가 떨어진다. 남자가 여자를 다시 보게 되었을 때, 그녀는 주머니에서 초코볼을 꺼내 먹고 남자는 집에 가는 길에 가게에 들러 초코볼을 산다. 그녀를 더 이상 만나지 못하던 어느 날, 그는 우두커니 앉아서 초코볼을 먹는다. 이 단순한 이야기 안에서 사건은 남자의 단추가 떨어진 것과 그 이후 만나지 못한 여자의 흔적이라도 되는 것처럼 떨어진 단추를 다시 발견하고 의자 깊숙이 밀어 넣는 것에 그칠 뿐이다. 하지만 창밖으로 지나가는 도시의 밤 풍경을 바라보는 편안한 남자의 표정, 밖으로 꺼낼 것까지 없다는 듯 수줍게 감정을 숨긴 남자의 미소, 버스 종점에 내린 남자가 주머니에서 초코볼을 꺼내 먹을 때의 얼굴에서 엷은 감정이 언뜻 내비친다. 마치 잔잔한 수면에 툭 던진 돌멩이가 만들어내는 파동처럼 이야기의 표면 위에서 나아가지 못한 감정들이 주변부로 확장된다. 마지막 씬은 늘 앉던 자리가 아닌 곳에 앉아 음악조차 듣지 않는 남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텅 빈 버스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는 남자로부터 멀찍이 떨어진 위치에 놓인 카메라는 남자와 여자의 얼굴, 떨어진 단추를 근접해서 바라볼 때 고여 있던 감정이 현재는 지나가버린 감정의 상태로 머무르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영화는 떨어진 단추가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을 원하지 않는 남자가 버스 한구석에 묻어버린 감정에 대한 기록이자 밤의 풍경에 대한 스케치다. 박준범은 남자의 얼굴과 걸음걸이, 그가 행하는 사소한 제스처에 집중할 뿐, 여자와 남자 사이에 생길법한 감정의 교류는 철저하게 배제한다. 그렇기 때문에 회색 음영이 엷게 스며든 도시의 공간과 밤이라는 시간이 빚어내는 감정의 조화는 배우 태인호의 연기로 인해 더욱 섬세하게 표현되고 정밀하게 세공된다. 그의 미세한 표정변화는 창밖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이루어진 자신만의 세계에 침입한 여자와의 첫 대면, 그녀의 어깨에 머리가 닿았을 때의 놀라움, 여자의 손이 그의 다리로 툭 떨어질 때의 긴장, 여자를 다시 만났을 때의 반가움으로 변주된다.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는 모호한 감정, 머뭇거리면서 잠정적인 상태에 머물 뿐인 스쳐 가는 현재를 포착하기 위해 박준범은 버스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바라보는 유동적인 도시의 풍경과 살짝 움직였을 뿐인 감정의 상태를 불러들인다. 바로 그때, 이 영화가 깊이 묻어둔 것과 관객에게 묻고 싶은 질문이 비로소 조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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