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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이스]인간의 시간

태준식, 2000

[초이스]인간의 시간 대표 이미지

아직 노동자뉴스제작단에 몸담고 있던 시절, 태준식 감독이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만든 첫 다큐멘터리 <인간의 시간>은 IMF 관리체제가 시작된 1998년, 민간기업 퇴출발표 명단에 있었던 현대중기산업 노동자들의 450여 일의 투쟁을 기록한 작품이다. 태준식 감독의 대표작으로 꼽히며 독립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꼭 보아야 할 작품으로 회자되기도 하는 본 작품은 뚜렷한 기승전결의 구조, 인터뷰와 투쟁현장의 적절한 분배, 적재적소에 배치된 설명적 내레이션의 활용으로 탄탄한 구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인간의 시간>을 좋은 작품으로 만들어준 것은 감독이 여러 차례 밝힌 바 있듯, “나이 든 노동자”들이 보여준 노동자로서의 자기인식과 정당성, 세상에 대한 혜안과 이를 믿고 따른 태준식 감독의 연출에서 기인한다.

퇴출이 발표된 후, 현대중기산업 노동자들이 내건 슬로건은 부당 퇴출 철폐가 아닌 ‘현대건설로의 고용승계’였다. 이전까지 ‘현대건설 중기사업소’였던 것이 89년, 현대중기산업으로 분리되어 나온 후 노동자들 측에서 지속적으로 현대건설로의 합병을 희망해오고 있던 차였다. 그러나 IMF 특단의 조치로 55개의 민간기업 퇴출이 발표된 상황에서 이와 같은 슬로건은 적극적이며 도전적인 대처였다. 이러한 요구를 내걸 수 있었던 까닭은 영화에서 느낄 수 있는 것처럼, 현대중기산업 노동자들이 가진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 때문이었다. 어느 집회에서 한 현대중기산업 노동자가 부르는 “한국에서 소련으로, 사우디에서 이라크로, 전 세계를 누비면서, 현대그룹 만들었네, 현대그룹 일등공신”이라는 노래의 가사는 현대중기산업 노동자들이 국내의 토목건설을 담당하며 근대화를 이끈 것은 물론 중동의 건설신화를 만든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하고 당당하게 여기고 있음을, 그것이 이들의 투쟁에 가장 큰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영화 중간중간 삽입되어 영화 전체를 이끄는 김병학 조합원의 인터뷰는 현대중기산업과 함께 나이 들어온 자신의 삶과 그에 대한 애정, 투쟁해온 동지들에 대한 애틋함을 느끼게 한다. 또한 “IMF라는 게 돈 있는 사람들이 해외에서 돈을 빌려다가 자기 사업을 확장하느라 빚져놓고 책임을 노동자들한테 다 돌리니 그게 제일 억울하지.”라는 그의 말에서 드러나듯, 노동자들이 IMF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가지고 있음을 드러낸다. 특히, 노숙 투쟁 중에 알게 된 식도암 발병 사실과 병에 대한 두려움보다 동지들과 투쟁을 함께하지 못한 미안함을 쑥스러운 듯 건네는 김병학 조합원의 이야기는 인터뷰 내내 무심한 듯 겸손한 태도로 차분히 말을 이어갔던 그의 모습과 더해져, 더욱 숙연한 마음을 자아내게 한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태준식 감독의 카메라는 투쟁이 마무리되고 노동조합 해산식도 끝난 1999년 11월, 관악산으로 등반을 간 현대중기산업 노조 조합원 두 명을 따라 나선다. 과천역에서부터 조합원들의 뒤를 비추거나 나란히 섰던 카메라는 등반 내내 같은 위치에서 묵묵히 그들의 여정을 쫓고 대화를 듣는다. 이 장면은 <인간의 시간>이후 15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지금도 꾸준하고 끈기 있게 ‘노동’이라는 소재를 놓지 않는 태준식 감독의 여정을 예감하고 있는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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