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
[초이스]별주부
김석원, 2013
*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병상에 눕게 된 용왕, 용왕의 병이 낫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토끼. 그리고 토끼를 잡아와야 하는 별주부(자라/거북). 이들의 이야기가 중심이 되는 구전소설이 바로 토끼전, 또는 토생원전 등으로 알려진 별주부전이다. 워낙 많은 필사본과 목판본, 판소리 등이 존재하기에 그 이야기의 결말과 내용이 상이하기도 하다. 주로 토끼와 별주부의 지략 대결이라는 줄기에는 변함이 없으면서도 결말에 도달해서는 다양하게 읽혀지기도 한다. 구전소설이라는 것이 그렇듯이 오랜 기간의 시대와 역사, 개인들이 창작과정에 참여하면서 다듬어지고 수정되는 것이 당연하다 보니 각각의 판본들은 언제나 시대의 화두나 이슈를 반영하기도 했을 것이다. 예컨대, 토끼 간을 얻지 못한 별주부의 이후 이야기는 시대와 이야기꾼의 성향에 따라서 결말이 조정되었는데, 별주부가 화타를 만나 용왕을 병을 고친 결말이나, 토끼의 지략에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하는 별주부가 등장하는 판본들이 대표적이라 할 것이다. 전자는 분명 왕의 안위와 신하된 도리를 최상의 선으로 여겼던 시대와 이야기꾼의 판본이었을 것이며, 후자는 왕의 폭압과 권력에 기지를 발휘해 대응하는 민중의 시대의 도래를 기대하는 역사와 이야기꾼의 판본이었을 것이다. 이야기는 언제나 역사의 세례를 받고 있는 개인 이야기꾼에 의해 만들어지지만, 그것은 또한 사회의 필요나 하나의 징후로 판명 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최근 한국사회의 많은 실사영화 작품들이 재난과 좀비에 대해 언급하면서 느닷없이 인물들 서로들 간에 “살아있네/음”을 끝없이 확인하는 것도 바로 그 역사의 이슈와 사회의 존재가 바로 종결과 전멸의 양상과 닿아있다고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자본주의의 전멸일 것일 테지만…)
자, 그렇다면 지금 우리 시대의 <별주부>는 어떻게 판본이 바뀔 수 있을까? 김석원 감독의 <별주부>(2013)는 이를 독특한 이미지와 장르적 클리쉐를 통해 이야기를 가공해냈다. 모든 등장인물들은 느와르 장르의 인물로 대체되어, 용왕은 죽음을 앞둔 조직의 보스로, 별주부는 조직의 명령을 받들어야 하는 인물로, 그리고 토끼는 스테레오 타입화된 팜므파탈로 그려졌다. 특히 이 작품은 등장인물들의 캐릭터가 상당히 인상적인데, CG작업임에도 불구하고 패인팅의 느낌을 최대한 강조한 이미지들이며, 실사의 이미지들과 겹쳐지는 캐릭터를 구성하여 독특한 인상을 불러일으킨다. 때문에 이 작품의 캐릭터들은 묘한 감성을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이야기의 구성 또한 현실과 회상(개인적으로는 상상이라 믿지만)을 교묘히 오가며 필요한 이야기 요소에 충분히 흡수되는 효과를 만들어내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이들이 구성하는 <별주부>다. 감독이 구축했던 느와르의 선택이 필연이었는지 모르지만, 등장인물들의 절멸은 왠지 필연처럼 보인다. 작품의 시작부터 토끼의 죽음으로, 결말에 이르러서는 별주부의 죽음을, 그리고 이후 이야기를 상상해 보자면 병을 고치지 못해 죽음에 이르게 될 용왕에 이르기까지 작품을 구성하는 모든 캐릭터들은 절멸하고 만다. 여기에는 토끼가 발휘하는 지략도, 별주부의 임무도, 느닷없이 등장해서 용왕의 약을 주었던 화타의 등장도 없다.
말하자면, 작품 <별주부>는 구전되는 이야기 속에서 가질 수 있었던 아이러니 ― 토끼를 죽여야 사는 용왕, 그 사이에서 심부름을 자처한 신하 ― 를 져버린 채 이전의 <별주부전>의 이야기구조 같은 형식이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어쩌면 지금 현재 우리가 처한 역사의 공간에는 충성을 다해야 할 대상도, 권력의 폭압에 대응하는 민중의 기대도 증발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역사 속에서 ‘별주부’와 ‘토끼’의 이야기 사이를 오가던 많은 이야기꾼들이 지금의 시대에 하나의 구전을 만들어 낸다면, 이 작품 <별주부>에서 드러내 보이는 절멸이 어쩌면 더 타당할 지도 모른다. 다만 힘없는 민중이라는 요소를 가졌던 토끼의 역할은 지금 우리의 시대에는 불합리한 명령을 지속해야 하는 ‘별주부’로 치환되었고, 작품의 마지막의 장면처럼 수많은 상어 떼 들 앞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별주부의 이미지가 자본주의 내부에서 지금 우리 모두의 상황을 대변하는 상황으로 변화 된 것을 제외하고 말이다. 어쩌면 또는 이처럼 우리시대에 써져야 할 구전의 상황이 너무나 당연할 것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