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
[초이스]일루셔니스트
실방 쇼메, 2010
“마법사는 없단다”
마술사 타티셰프는 자신을 따르던 소녀 앨리스에게 이런 메모를 남기고 떠난다. 소녀는 그래서 환영의 허깨비를 벗어던지고 비로소 세상을 바라보게 된 걸까? 마술사로서는 나름의 배려였다. 자기가 없더라도 소녀는 살아야 한다.
실뱅 쇼메의 <일루셔니스트>는 더이상 매력적이지 않은 마술사와 여전히 마법으로 자신의 작은 욕망이라도 채워야 살아갈 수 있는 소녀의 이야기이다. 프랑스 희극 배우 겸 감독인 자크 타티가 자기 딸에게 들려주기 위해 쓴 원작 이야기에 기반하고 있고, 타티의 열렬한 팬인 쇼메는 기꺼이 그의 우상에게 헌정하고자 만든 작품이다. 그래서 마술사의 몸동작은 기꺼이 타티의 페르소나인 윌로씨를 따른다.
허나, 쇼메의 전작인 <벨빌의 세 쌍둥이>와 마찬가지로 <일루셔니스트>는 여전히 영화에 대한 영화, 또는 영화에 대한 애니메이션이다 (이때, 영화는 라이브 액션이 아니라 시네마를 지칭한다). 단지 타티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졌다든지, 작품 중간에 라이브 액션의 장면이 삽입되었다든지 때문만은 아니다. <벨빌의 세 쌍둥이>와 <일루셔니스트>는 분명 특정 시대를 배경으로 삼지만 (전자는 모호하지만 2차대전 무렵, 후자는 1959년),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끊임없이 영화의 탄생기로 되돌아가게 된다. <벨빌>의 세 쌍둥이가 전성기를 누렸던 보드빌 시대라든가, <일루셔니스트>의 마술사가 전성기를 누렸던 마술쇼의 시대로 말이다. 이들은 현재는 쇄락했지만, 왕년에는 나름 잘 나갔다고 여긴다. 그 잘나갔던 왕년이 바로 영화가 등장하던 무렵이다. 시네마토그래프를 비롯한 초기 영화는보드빌과 마술쇼의 연장선 위에 놓여있다. 그리고 이 두가지 퍼포먼스 전통은 초기 영화의 ‘보여주기’exhibitionism 매력의 핵심적인 두 주춧돌이다(하물며 ‘벨빌’도 초창기 고몽 스튜디오가 있던 지역 이름이기도 하다.)
이러한 기원의 오버랩을 배경으로 삼아 중심에 놓이는 것은 인간의 몸짓이다. <벨빌>의 핵심 사건인 납치극이 목적으로 삼은 것은 사이클 선수의 노동력이다. 이는 불법 사이클 도박을 위해 영상을 만들어내는 원천으로 쓰인다. <일루셔니스트> 역시도 마술쇼의 트릭을 만들어내는 것은 마술사의 기민한 손동작과 관객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분산시키는 다양한 제스쳐이다. 뿐만 아니라 마술사가 등장하는 쇼의 다른 등장인물들인 곡예단이나 인형극 복화술사 또한 몸을 통한 표현이 중심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의 몸짓, 볼거리로서의 몸짓을 재배치한 것이 바로 영화였다. 영화는 카메라 앞에 이들의 몸짓을 피사체로 세우고 필름에 기록하였다. 그 이후, 사람들이 바라본 것은 살아있는 피사체의 몸이 아니라, 빛과 그림자에 의해 투사된 이미지였다.
기실, 영화 매커니즘은 상영 공간에서 인간 몸의 존재를 적극적으로 지워나갔다. 납치된 사이클 선수처럼, 영사기의 크랭크를 손수 돌려가며 움직임을 만들어냈던 영사기사는 처음에는 관객 사이에 있었지만, 곧 영사실로 격리되고 이내 모터로 자동화되었다. 마술사의 트릭은 편집 기술로 넘겨졌다. 스크린은 무대를 대체하였고, 스크린과 영사기 사이에서 인간은 사라지고, 기계 장치가 그 역할을 대신한다.
<일루셔니스트>의 핵심은 마술사 타티셰프가 극장 안에 들어갔다가 그 곳에서 실제의 자크 타티 영화와 마주하는 장면이다. 그것은 단지 타티에 대한 감독의 소소한 오마주에 불과하지는 않다. 그 장면에서 애니메이션과 라이브 액션은 서로를 마주보고 있다, 마치 거울처럼. 앨리스가 타티셰프의 모습을 보았던, 그래서 타티셰프가 한사코 다시 서기를 거부했던 백화점 쇼윈도우와 대비되는 설정이다. 쇼윈도우는 상품에 대한욕망을 ‘환영’illusion으로 보여주는 장치이다. 영화 스크린과 유사한 원칙으로 움직이되, 스크린이 2D라면 쇼윈도우는 3D인 셈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3인조 곡예단과 마술사가 함께 작업했던 간판 그림이 매개체로 역할을 해왔다. 초기 애니메이션의 선구자 중 하나였던 제임스 스튜어트 블랙턴도 이 직종에서 일했던 경험이 있다)
쇼메의 작품을 영화에 대한 영화, 혹은 영화에 대한 애니메이션이라고 부르고자 하는 이유는 이 지점이다. 영화의 기원과 인간의 실종 (때론 멸종)을 다루는 그의 작품들은 2D와 3D의 경계에서 이루어진다. <벨빌>과 <일루셔니스트>는 2D의 따뜻한 손맛을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3D 이미지가 곳곳에 들어가 있다. 그런데 둘 사이에 어색한 긴장감이 흐르기 보다는, 2D에 기반한 현실 공간으로부터 3D로 구현된 환상과 상상, 혹은 일탈과 자유로움의 공간으로 확장된다. 굳이 실뱅 쇼메의 라이브 액션 작품인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 정원>까지 이르지 않더라도, 이미 그의 작품들 속에는 라이브 액션과 애니메이션, 그리고 2D와 3D라는 이질적 세계들이 서로를 침투하며 녹아들고 있다. 이는21세기에 비로소 등장한 융복합적 영상 현상이 아니라, 영화의 역사 초기에 애니메이터들이 카메라를 만지작대면서 이미 넘치도록 쏟아냈던 산물들과 닮아있고, 닿아있다. (사족을 달자면, 그 당시 animated pictures는 라이브 액션 영화를, animated cartoon은 애니메이션을 가리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