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
[초이스]탐욕의 제국
홍리경, 2012
삼성전자 기흥공장 주변엔 노동자들의 기숙사가 있다. 각 동마다 `개나리` `라일락` `수선화` 등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생명 없는 시멘트 덩어리에 예쁜 꽃 이름을 넣으면 그나마 힐링이 될 듯 보이지만 홍리경 감독의 <탐욕의 제국>에서는 그런 애처로우면서도 기만적인 네이밍이 기실 `삼성`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시멘트 덩어리에겐 예쁜 이름을 지어줄 여력은 있지만 그 안에서 고통받고 스러져 갔을 젊은 영혼들에겐 무어라 부를 의지도, 만날 생각도, 대화할 노력도 없는 것이 `삼성`이다. 차갑고 딱딱하고 숨이 막힐 듯 건조하게 <탐욕의 제국>은 바로 자본 권력의 비인간성을 깊게 각인시킨다.
6년 전, 고 황유미 씨의 죽음으로 세상에 알려진 반도체 공장 노동자들의 산업재해는 충격적이다. 제보된 건수는 200건이 넘으며 사망한 노동자는 79명. 이중 삼성 관련 공장에서 사망한 노동자만 69명이다. 피해자 유족과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은 삼성의 사과와 산업재해 인정, 그리고 노동자들의 건강권을 위해 지난한 투쟁을 벌이고 있다. 이 사회적 비극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며 여전히 거대한 힘을 가지고 있는 삼성과 정부는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여기까지가 다큐멘터리 <탐욕의 제국>을 구성하게 한 팩트다. 선한 존재와 악한 존재라는 이야기의 구도는 명확하며 현존하는 비극은 관객들의 감정적 분노를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폭로와 선동, 사회적 환기라는 다큐멘터리의 목표에 적확하게 부합하는 사건이라 하겠다.
하지만 홍리경 감독은 폭로와 감정배설만을 위해 이 작품을 연출한 거 같지는 않다. 데뷔작이라고는 믿기지 않게 사려 깊게 선택한 이미지와 냉정하면서도 공정하게 분배된 인물 시퀀스의 배치. 또한 운율에 따라 곱게 잘리는 안정적인 커팅 대신 낯설게 분절된 영상과 음성의 재조직으로 관객들로 하여금 삼성이라는 거대자본의 본질에 대해 성찰케 한다. 예를 들어 중간 부분.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갯속, 앞에서 이야기한 기숙사 건물(이 건물은 작품 속에 몇 번 나누어 등장한다) 위에 얼굴 없는 증언자들의 목소리가 등장한다. 그렇게 들어가고 싶었던 삼성이었지만 사실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그곳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노력을 했었다는 내용이었다. 초일류기업 이미지를 갈취한 `삼성`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뭐라 딱히 이야기할 수 없는 불안으로 그곳에서 벗어난 이후의 삶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역설이 안개 낀 시멘트 덩어리 위해 새겨진 `개나리`위에 흘러나온다. 노동자들은 불안하고 불안의 정체는 미래에 확인된다. 그렇게 우리가 인지 못하는 시간 동안 그 비극은 지금과 `연결`되어 있고 그래서 이후의 미래는 안개 낀 날씨처럼 흐릿하다. 홍리경 감독은 이렇듯 보이는 것과 들려지는 것 사이에 `연결`을 성찰케 하는 공간을 만들어 냈다. 그래서 관객들로 하여금 거대자본 삼성이 이 사건의 책임으로부터 어떻게든 벗어나려 하는 기만을 더욱더 큰 분노로 비판하게 한다. 힘 있는 국회의원에겐 또박또박 쉰 소리로 답하지만 피해자의 호소엔 단 한마디도 응대하지 않는 삼성전자 부사장의 표정에서 `관리의 삼성`이라는 은밀한 속살을 묵도하게 한다. 수십 명의 젊은 노동자들의 허망한 죽음도 기업의 존재를 위해(이건희라는 일개인의 존재일 수도 있겠다) 충분히 막아낼 수 있다는 저들의 자신감을 확인한다. 돈으로부터 만들어진 권력의 실체를 말이다.
다큐멘터리 작가는 필연적으로 사회적 비극의 주인공들과 관계를 맺는다. 모든 관계가 다 그렇듯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작가 개인은 그 스트레스로부터 자신을 지켜야 할 과제가 존재한다. 아마도 홍리경 감독도 그 관계로부터 <탐욕의 제국>을 생산하기까지 꽤 많은 고통이 있었으리라. 작품 속 첫 번째 피해자로 등장했던 이윤정 씨는 작품 속에서 결국 죽음을 맞이한다. 청계천과 인사동을 가보고 싶어 했던 그녀는 젊은 나이에 아이와 남편을 두고 먼저 세상을 떠난다. 옆에서 그 시간을 함께 했을 감독은 냉정하리만치 큰 인내심을 발휘한다. 고 이윤정 씨 본관 앞 노제를 치르기 위한 피해자와 경비들 간의 극심한 충돌의 한 가운데 (작품 속 유일한) 피해자의 비명 섞인 울음이 터져 나오는 그 순간. 카메라는 작정을 한 듯 멀리 떨어져 하이앵글로 그 모습을 보여준다. 너무하다 싶은 정도의 인내심이었다. 그 인내심은 하지만 현실 이미지의 임의적 전취를 추구하는 다큐작가의 실험 따위와는 궤를 달리한다. 홀로 떨어져 자신만의 언어를 생산하고 만족해하는 작가가 아니라 현실 속 사람들의 비극을 대하는 한 인간적인 작가의 고뇌와 인내심이라 불러야겠다. 이런 장면이 있다. 치열하게 분노를 쏟아내야 하는 시위의 공간에서 피해자 한혜경 씨는 노래도 못하는 바보가 되었다며 자신을 한탄하는 인터뷰를 한다. 하지만 한혜경 씨는 마지막 부분 엄마와의 대화 속에서 장애인의 삶을 얻었어도 자신의 인생은 충만하다 단호하게 말한다. 비극은 끊임없이 재생산되지만 희망은 이렇듯 희망을 상실한 사람들에게서 만들어진다는 잠언을 현실에서 확인하는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피해자와 그 유족들의 고통을 온전히 나누어지고 함께 했을 홍리경 감독의 2년간의 시간이 가치 있게 작품 속에 스며들었음을 <탐욕의 제국>이라는 다큐멘터리는 보여준다.
이제 갓 공개된 작품에 대한 지나친 기대일 수도 있겠으나 나는 이 작품이 꼭 극장에 개봉되는 모습을 보고 싶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 작품 자체를 읽고 공감하기 위해선 극장이라는 공간이 가장 적합하기 때문이다. 중간 한혜경 씨와 어머니가 삼성전자 부사장을 면담하는 장면에는 긴장 타는 두 대립하는 인물들만 보이는 것이 아니다. 작품 속 자주 등장하는 반올림 활동가 이종란 노무사의 얼굴도 보인다. 이 얼굴 속에 담겨진 표정을 읽어야 한다. 극장이라는 곳이 아니라면 화나면서도 안쓰러우면서도 슬픈 그 표정은 보이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이 장면뿐만이 아니다. 중간 중간 삽입된 항구에 야적된 컨테이너 이미지들과 삼성 본관에서 뿜어져 나오는 하얀 연기를 작가의 숨결로 인지할 수 있는 건 극장뿐이다. 매체 특성을 완성도 있게 받아들이기 위해 <탐욕의 제국>은 꼭 극장에서 보시라 권유하고 싶다. 연관해 또 다른 이유가 있다. <탐욕의 제국>은 독립다큐멘터리가 현실의 정치적 상황에 개입하는 방법으로 극장을 선택하는 의미에서도 부합된다. 탐욕스러운 기업 삼성의 본질을 알리고 반도체 노동자들의 건강권은 더욱 확장되어 소통되어져야 한다면 <탐욕의 제국>은 그 역할을 담대히 담당할 작품이다. 그렇지만 동시에 <탐욕의 제국>은 또 다른 질문을 만들어 낼 것이다. 독립다큐멘터리를 활용(!)했던 운동권이 이 작품을 어떻게 읽고 소화해 하나의 문화로 블로우 업 시킬지를 확인하는 여정(극장 개봉하는 과정) 속에 메마른 이 커뮤니티의 소비문화에 대해 자연스레 되돌아볼 가능성이 높다. 한편의 다큐멘터리가 ‘소비를 위한 선택’이라는 극장의 시장문화를 넘어 영화적 소비와 토론과 각성의 정치적 효과, 더불어 공동의 문화발전을 위한 단초가 된다면 극장 개봉을 안 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탐욕의 제국>은 그럴만한 작품이라 확신한다.
잘 살펴보면 알겠지만 <탐욕의 제국>의 첫 화면과 끝 화면은 같다. 하지만 분명히 다르다. 첫 화면을 통과해 끝 화면으로 빠져나와 다시 문을 열고 현실로 돌아갈 때 관객들은 탐욕의 제국이 지배하는 사회를 같은 모습이지만 다르게 바라볼 것이다. 이것이 <탐욕의 제국>이 있기 전과 후의 차이이며 하나의 다큐멘터리가 이 세상에 깊게 새겨 놓은 흔적이다. ‘탐욕의 제국’은 그렇게 존재할 다큐멘터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