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
[초이스]리피트
미카엘라 파블라토바, 1995
한 사내가 개를 데리고 산책을 나선다. 산책길에서 만나는 이들은 늘 한결같다. 눈인사를 슬쩍 던지는 매력적인 여인, 자전거를 타고 내달리는 사내, 시간에 쫓겨 서두르는 회사원. 이들의 일정과 경로는 한 치의 오차 없이 매일 반복된다. 이렇게 되풀이되는 일상 속에 세 커플의 삶도 반복된다. 묵묵히 신문만 읽는 남편과 그에게 식사를 떠먹여 주는 아내, 목을 매려는 사내와 그 목줄을 끊어주지만 결코 그를 받아들이지는 않는 여인 (그래서 다시 목을 매려는 사내), 그리고 반갑게 내달려와 사랑을 나누려다가도 전화 소리에 황급히 떠나버리는 여인과 그로 인해 좌절하는 사내. 이들의 관계는 끝없는 도돌이표 속에서 돌아간다.
우리의 하루하루는 이렇듯 어제와 별다를 바 없고, 내일도 오늘과 크게 차이 날 것 같지 않은 반복의 궤적을 따라가지 않는가?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라는 표현처럼, 삶은 꽉 짜여진 궤도 속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않는다. 안정적인 것 같지만 권태롭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혹시 세 커플의 맥빠진 관계에서 엿볼 수 있듯이, 진정한 사랑 (이 작품에서는 그 대상이 첫사랑임을 암시한다)을 만나지 못한 탓일까? 그래서 리셋 버튼을 누르듯, 관계를 (애초에 원했던 상대를 만나서) 새롭게 시작한다면 날마다 행복할까?
산책을 시작하는 사내의 발걸음에 맞춰 경쾌하게 들려오는 테마 음악은 이야기의 전개를 따라 점점 고조되고, 가속도가 붙는 반복의 패턴은 급기야 폭발점에 다다른다. 마침내 감독 미카엘라 파블라토바는 반복의 전개를 멈추고, 기꺼이 세 커플의 짝을 교체시켜서 삶을 재부팅 시킨다. 그렇게 새롭게 시작하는 삶은, 그러나, 이내 이전의 상황과 마찬가지로 반복과 권태로 복귀한다.
삶이란 그런 것이다. 어떠한 짝을 택해도, 그 짝이 이상형에 부합할지라도, 일단 관계가 일상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반복의 덫을 피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결코 벗어날 수 없는 반복의 삶, 그것이 강제하는 권태의 늪을 순순히 받아들이라고 우리에게 말하는 것일까? 아니, <리피트>의 힘은 체념을 권하는 표면에 맞붙어 있는 뒷면을 보여주는 지점에 있다. 바로, 목줄을 끊고 도망쳤던 개가 다시 주인에게 꼬리를 치며 돌아와서는 순순히 다시 그 목줄을 묶는 장면 말이다. 이 모습은 단순해 보이는 이 작품에서 가장 경악스런(!) 장면이다. 그리고 파블라토바가 우리에게 던지는 메세지이기도 하다. 벗어날 수 없는 반복의 일상에서 당신은 순순히 주인에게 목줄을 맡기고 마는 개와 같은 삶을 살 것인가? 우리가 되풀이되는 일상에서 참을 수 없는 답답함을 느끼고, 이로부터 진실로 벗어나고자 한다면 결국 우리는 목줄 없이도 삶을 살아나갈 각오가 필요한 것이다.
이 작품은 내가 애니메이션에 비로소 관심을 갖기 시작할 무렵에 강렬한 인상으로 다가왔고, 이후 단편 애니메이션 제작을 할 때에는 물론이거니와, 누군가에게 애니메이션에 대해서 소개하고 설명해야 하는 현재까지도, 이야기의 구조와 작품 전체의 얼개를 소개할 때 본보기로 삼는 작품들 가운데 하나이다. 단순한 모티브를 가지고 반복과 차이를 어떻게 끌어낼 것인가, 그리고 그것들의 귀결을 이끌어낼 때 단순함 속에 어떻게 다양한 결말을 포함할 수 있을까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걸음걸이의 구현과 같은, 일정하게 반복되는 애니메이션 움직임 (사이클)을 이야기 속에서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으며, 게다가 4/4박자의 음악이 등장인물의 움직임을 강조함은 물론이거니와, 반복과 증폭을 통해서 주어진 짧은 시간 내에 관객의 귀에 익숙하게 되어, 결국 마지막에는 어떻게 박수까지 유도해낼 수 있는지 (그리하여 페스티벌 같은 무대에서는 관객의 호응도를 통해 심사위원들에게까지 어필하는지)는 애니메이터에게 귀중한 덤으로 다가올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