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
[초이스]암사자(들)
홍재희, 2008
가끔 대단한 이야기도 아니고, 되게 훌륭한 뭔가를 가지고 있지도 않지만 꽤 오래 기억에 남는 작품이 있다. 내게 홍재희 감독의 <암사자(들)>은 그런 영화 중 한 편이다. 마장동 우시장을 배경으로 폭력에 대한 짧은 우화를 들려주는 이 영화는 섬뜩함과 기묘한 웃음기를 동시에 가진 영화다.
우시장에서 도축업을 하고 있는 정희는 남편의 폭력에 시달리는 여자다. 매일 도박으로 시간을 때우며 집안일은 돌보지 않는 남편 탓에 아이의 미래가 아예 블랙홀이라 홀로 병원에 가 낙태 시술까지 받을 정도로 인간적인 면에서 핀치에 몰려있다. 이는 주변 상인들에게도 알려져 있는 사실이라, 다른 가게의 아주머니들은 정희를 동정하지만 그렇다고 이렇다 할 도움을 주기도 어렵다. 그런 상황에서 옆 가게 내장집 아지매는 고기를 싫어하는 정희에게 소의 골로 만든 요리를 내밀며 “고기 파는 년이 고기를 싫어해서 어떻게 해. 강해지려면 육식을 해라. 육식을 해야 사자 맹키로 힘이 나는기라.”라고 말한다. 이 말이 신경 쓰이는 정희는, 그 날부터 고기를 먹기 시작한다.
고기를 먹은 정희가 갑자기 힘이 나서 남편을 때려눕히고 ‘아싸 좋구나’ 하는 건 아니다. 그녀는 먹지 않았던 ‘고기’를 먹으면서 해보지 않았던 생각을 하기 시작한다. 하우스에서 탈탈 털리고 돌아와 아내를 향해 비굴한 웃음을 지으며 모아놓은 돈 없느냐고 묻고, 기어코 주먹을 휘두르는 남편을 거대한 소의 뒷다리 뼈로 대가리(이런 놈은 굳이 ‘머리’라고 부르지 않아도 좋을 것 같다.)를 박살 내며 외친다. “나는 년이 아니라 정희야. 김! 정! 희!” <황해>의 면정학보다 2년 앞서 ‘뼈’가 가진 무기로서의 박력을 맘껏 보여준 뒤, 그녀는 당황하지 않는다. 오히려 표정은 편안해 보인다. 집에 가던 길에 정희를 보러 들른 내장집 아지매는 이 광경을 목격하고 시장의 친한 동료들을 부른다. 마장동 우시장 외길인생을 보내온 이들이 모여서 할 일은 무엇인가? 에이 알면서...
여성에 대한 폭력이 화두가 된 것은 한두 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한 개그맨의 망언으로 ‘여성혐오’와 ‘페미니스트’가 또 한 번 쟁점이 되기도 했다. SNS를 필두로 한 넷상에서는 꽤 활발하게 논의가 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넷을 벗어나면 오히려 ‘지들끼리 한 얘긴데’라며 두둔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렇게 간단한 이야기가 아님에도, 대충 흘려보내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그 개그맨은 가장 하차 요구가 컸던 단 하나의 프로그램에서만 하차했고, 나머지에는 꾸준히 출연하는 중이다. 발언의 강도를 생각한다면 나름 편해 보이는 조치다. 반성은 했을까? 글쎄. 사과문을 읽어보면 좀 아리송한 기분도 든다. 연예인을 ‘공인’으로 보지는 않지만 본인의 발언으로 상처받은 사람들이 존재하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아니 공인이고 뭐고를 떠나 옆집 아저씨가 한 이야기라 해도 ‘저 아저씨 이상하다. 말 섞지 말자’ 라고 할 만한 수위이지 않은가.
이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암사자(들)>이 떠올랐다. 말을 해도 못 알아듣고, 안 듣고, 맥락을 파악 못 하는 사람이 꽤 많은 상황을 보면서 어쩌면, 이치에 맞고 합리적인 논쟁보다는 오히려 ‘니들 자꾸 그러면 정형해버린다! ㅋㅋㅋ’ 하는 이런 식의 이야기가 더 눈높이에 맞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크레디트가 올라가며 나오는 마장동 인간정형 4인방의 호쾌한 콩트에는 “이놈 꼬추는 내가 잘랐다! 이걸 꼬추라고 달고 다녔냐 으이그” 하는 식의 구수한 대사들이 들어있다. 앞으로 아파트의 어린이들에겐 ‘너 자꾸 쿵쾅거리면 마장동 아줌마가 꼬추 떼어간다?’ 라고 말하는 것이 더 잘 먹힐지도 모르겠다. 뭐 다 웃자고 하는 이야기다. 그러나 문제가 발생하면 그저 생각나는 대로 떠들지 말고, ‘왜’ 그런지 좀 더 넓은 견지에서 생각하고 이야기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홍재희 감독은 2012년에 <아버지의 이메일>이라는 다큐멘터리로 좋은 평가를 얻고 차기작을 준비 중인 것 같다. 낯선 공간과 익숙한 이야기가 만나 미묘한 재미를 준 <암사자(들)>같은 작품을 기대해 본다.
P.S : 이 영화는 단편영화 전문 온라인 상영관 유에포(youefo.com)에서 볼 수 있다. http://youefo.com/film/3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