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
[초이스]창백한 얼굴들
허범욱, 2014
너와 나는 틀리다. 아니다. 너와 나는 다르다. 우리는 종종 ‘다르다’와 ‘틀리다’를 혼용해서 쓴다. 사전적인 차이를 몰라서 그런 건 아닐 것이다. 언어는 일종의 습관이자 무의식이다. 대수롭지 않게 쓰는 말에도 자신과 다른 존재를 배척하려는 태도가 자연스럽게 배어 나온다. 슬프지만 우리 사회는 아직 상대와의 차이를 인식하고 다름을 받아들이는데 서툴다. 차이를 발견하면 생긴 모습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열 관계를 설정하고 줄을 세우는 것부터 시작한다. 그래야 안심이 되기 때문이다. 허범욱 감독의 <창백한 얼굴들>은 우리 사회에 내재된 이러한 배척과 폭력의 양상을 포착한 작품이다.
모든 것이 무채색인 가상의 행성이 있다. 다들 하얀 피부를 가지고 있는 이 세계에서 민재는 노란 피부를 가지고 태어났다. 사람들은 그런 민재를 괴물이라 말하며 두려워한다. 민재의 부모는 그런 민재를 방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한다. 세상으로부터 민재를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격리하고 감추기 위해서다. 부모는 저주 받은 존재가 태어났다며 끊임없이 민재를 원망하고 민재는 세상으로부터 쏟아지는 욕설과 폭언, 그리고 폭력을 양분 삼아 자란다. 세상과 격리된 지 어느덧 15년, 드디어 세상에 홀로 남겨진 민재는 사람들 속에 섞여 들어가고자 애쓴다. 자신의 색을 지우려 하지만 방법을 알 수 없고, 끝내 자신을 받아주지 않는 세상을 탈출하고 싶어 하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다.
<창백한 얼굴들>의 설정과 표현은 그 자체로 효과적이고 직관적인 메타포다. 무채색의 세계는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일그러진 사회의 은유다. 감독은 그 안에서 (관객의 관점에선 유일하게 정상인) 민재가 어떻게 일그러져 가는지 관찰한다. 민재를 괴물 취급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판타지라기보다는 우리 사회의 자화상이자 감독의 겪은 경험들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에 가깝다. 집단과 조금이라도 다른 의견을 내비치는 존재를 틀린 것으로 격하시키고 폭력을 통해 서열을 잡으려는 자들의 초상이 영화 전반 상징적으로 압축되어 있는 것이다.
사실 어떻게 보면 이 같은 상징과 전개가 때로는 지나칠 만큼 도식적이라 식상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다름을 개성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비틀린 세계, 폭력으로 이를 거부할 줄밖에 모르는 사람들과 이를 대물림 하는 부모. 조건이 이 정도로 짜여 있다면 사건이 파국으로 나아가는 게 필연이다. 파국은 어떻게 찾아오는가. 우리는 대개 파국의 순간은 또렷이 기억하지만 그 순간이 오기 전까지의 과정은 기억하지 못한다. 겉으로 드러난 잔혹함, 황망함에 눈길을 빼앗겨 본질을 잊어버리는 사례는 지금도 흔하다. 허범욱 감독은 적어도 이 지점을 놓치지 않았다. <창백한 얼굴들>은 밀물처럼 소리 없이 차오르는 부조리가 어느덧 턱밑까지 차올라 당황하는 사람들에게 문제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를 잔혹하게 고발한다. 미지의 존재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을 폭력과 억압으로밖에 다스리지 못하는 사회에는 미래가 없다. 파국은 어느 순간 찾아오는 게 아니라 거미줄 같은 균열 한 가운데 있는 법이며 이 작품은 우리 안의 파국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힘이 있다.
사실 빈말로도 편하고 가볍게 접근할 수 있는 작품은 아니다. 하지만 아직은 어색한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법을 익히기 위해서라도 우리에겐 이런 색깔, 개성, 목소리가 필요하다. 연상호 감독의 <사이비>에 이어 2015년 홀랜드애니메이션필름페스티벌에서 장편 그랑프리를 수상하며 그 개성이 진짜임을 이미 인정받았다. 특히 폭력의 이미지를 만화적 상상력과 결합시킨 작화 방식이 흥미롭다. 만화, 컷 아웃, 실사 등 디테일하고 실험적인 기법들이 익숙한 듯 새롭게 펼쳐진다. 해조류와 채소를 변형시킨 배경과 상상력도 재미있다. 단순히 불편함, 자극적, 충격적인 묘사와 강한 메시지를 넘어 적절한 표현을 하나하나 신중하게 고른 감독의 고뇌와 정성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흔한 이야기를 흔하지 않게 포장할 줄 아는 소중한 재능이다. 그 개성이 앞으로 어떤 당연한 이야기를 당연하지 않게 풀어 놓을지, 다음이 더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