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
[초이스]이름들
신이수,최아름, 2013
젊은 시인은 오늘따라 일이 많다. 아침엔 도장을 하나 새로 팠다. 직거래로 카메라도 처분했다. 오후엔 누나를 만나서 방 키를 받았고 출판사에 가서 계약서도 썼다. 이 모든 일들을 성실히 처리하는 동안, 어쩐 일인지 시인 얼굴이 어둡다. 술 한잔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시인은 시가 담긴 수첩을 잃어버렸음을 알게 된다.
최아름, 신이수의 <이름들>은 잃어버린 수첩에 담긴 ‘소음들’에 대한 영화다. 영화 내내 낮은 소음들이 맴돈다. 자동차의 소음,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 웅성대는 목소리들이 시인을 따라다닌다. 그 소음들은 시인의 수첩 안에 모두 기록되어 시가 되었다. 한편 <이름들>은 ‘반사''''의 이미지로 만들어진 영화이기도 하다. 많은 장면에서 영화는 유리창에 반사된 주변 환경들을 보여준다. 반사된 이미지들은 유리창 안의 시인과 겹쳐서 마치 시인 안으로 스며드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고 보면 이 영화를 이렇게 정리할 수도 있겠다. 시인이 서울을 배회하면서 만나는 ‘소음’과 ‘반사’의 주변 환경들이 시인의 몸을 통과해 배출되는 ‘시’에 대한 이야기라고.
문제는 그 시가 담긴 수첩이 사라져 버렸다는 것에 있다. 수첩은 어디로 갔을까? 누나에게서 받은 키가 열쇠 구멍에 들어가지 않자 시인은 옥탑방 난간에 기대어 생각에 잠긴다. 시인은 하루의 일과를 하나씩 떠올려 보면서 수첩이 어디 있는지 헤아려 본다. 영화 내내 시인을 맴돌았던 소음이 그 순간 천천히 사그라든다. 잠시 우리는 침묵 속에서 시인의 민얼굴을 본다. 그는 갑자기 무언가를 떠올린다.
화면이 전환되고 한 남자의 시 낭송이 울려 퍼진다. 이 남자의 낭송이 끝나고 나면 한 여자의 낭송이 이어진다. 놀랍게도 이들은 모두 시인의 수첩을 읽고 있는 중이다. 여기에 이 영화의 마술 같은 힘이 있다. 분명 잃어버린 수첩은 하나였을 텐데, 습득한 사람은 한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것이 스스로 복제되어 무한 증식이라도 하는 걸까.
수첩을 가져간 첫 번째 사람은 직거래로 카메라를 사 갔던 남자다. 그는 영화의 첫 장면에 시 속의 이미지처럼 등장했다가 영화의 중반에 다시 등장했었다. 두 번째로 수첩을 습득한 사람은 시인의 친누나다. 누나는 동생과 사이가 좋아 보이지는 않는데, 아마도 수첩 속의 시를 통해 동생의 마음 안으로 처음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영화에 제시되지는 않지만 출판사 여직원 하나도 시인의 수첩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녀는 시인의 새로운 이름을 아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이다. 이런 방식으로 시인은 오늘 스쳐 지나간 사람들에게 시를 돌려주었다. 수첩은 사라졌지만 시가 그 자리에 남았다.
(전략)
누나,
나는 언제나 누나에게 이야기하고 싶었어
엄마 아빠가 늙어가는 것
언젠가 우리가 들어가야 할 텅 빈 집과
그때 우리가 울지 않고 해야만 하는 일들에 대해서
누나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름과
누나가 우는 이유
내가 했던 잘못들에 대해서
하지만 나는 성의도 없는 거짓말로
내 먹을 밥과
태어나지도 않은 강아지들의 이름에 대해서만 이야기했잖아
누나는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내가 지나야 할 시간이 아직 많다는 게 언제나 무섭다고
누나에게 말하고 싶었어
누나, 나는 무서워
내가 본 최아름, 신이수의 <이름들>은 시를 통과시키기에는 너무 버거운 세상을 통과하는 시인들에 대한 이야기다. 고통을 받고 찢어지면서도 시인들은 여전히 시를 쓰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젊은 시인에게는 지나야 할 시간이 아직 많다. 그는 이 시간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