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
[초이스]라오스
임정환, 2014
내가 본 세계는 이미 일그러져 있었고
내가 본 세계는 이미 무너져 있었고
내가 볼 세계는
그 다음은
- 매드 클라운 <껌> 중에서
그러니까 어떤 영화들, 별일 아닌 듯 반복되는 이상한 시간들, 정작 영화는 유쾌하지 않은 장면을 아무렇지 않은 듯 보여주는데도, 객석의 나는 어딘지 불편한 의혹을 떨쳐버리기 위해 끝없이 어떤 번역 혹은 해석을 해야만 할 것 같은 영화들이 있다. 물론 임정환 감독의 <라오스>는 그것에 대한 해명을 요청하지 않는다. 그저 어떤 불안의 정체를 모른 채, 집으로 향하는 그 밤 내내 시달리기를 바랄 뿐이다. 그것은 악마의 ‘다녀감’처럼 스산하다. 이 영화에 등장한 이상한 음악, 케미컬 브라더스의 ‘The devil is in the details’처럼 영화 <라오스>는 전체가 사소한 것이 되기를 원했고, 사소한 것이 전체를 이루기를 원했다. 강한 비트들의 반복처럼 그들이 원하지 않았던 것들, 혹은 원했던 것들이 저 멀리 알 수 없는 시간들을 통해서 다시 회귀한다. 영화 <라오스>에는 터져 나오는 웃음과 감추어진 의혹들의 연쇄 반응으로 인한 기이한 불편함이 도처에 머물러 있다.
영화 초반 감독으로 등장하는 원식은 조연출인 후배 현철이 시나리오를 바꾼 것이 불만이다. 갑자기 여배우가 절(수상법당)에 왜 들어가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때 현철은 이 영화에서 끝없이 반복되는 질문이자 영화 전반을 들여다볼 수 있는 대답을 한다. ‘일일이 다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의도 없이 그저 보여주는 것이고 그것은 대사를 퉁 치는 것이라고.’ 그때 원식의 대답은 또 이렇다. ‘그러니까 뭘 퉁 치고 뭘 보여주는 거냐고, 절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의도가 있는 것’이라고. 수상법당에서의 원식의 질문 ‘시나리오를 왜 따르지 않는가.’는 돈을 벌기 위해 떠난 태국에서의 현철의 대답 ‘인간의 본분을 잊지 않아야 한다.’는 동일한 말을 다른 차원에서 반복한다. 어떻게든 자신의 논리로 자신이 합리적이라 믿는 확신만 강화하는 상황. 그런 확신으로 자신의 의미의 지층을 설계할 때, 현실의 상황은 더욱 뒤틀리고, 포착되지 않는 세계는 불안으로 자꾸 표류하는 것이다.
나는 마치 현철이 글을 쓰면서 이미 떠나버린 원식을 장면 내에 불쑥 들여놓은 것처럼, 문득 <메콩호텔>(2012)을 떠올렸는데,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이 메콩 강 어귀에 살다가 사라져버린 어떤 삶의 기억들을 복원한 것처럼, 영화 <라오스>는 기억의 미래를 현실로 불러들인다. 우리의 현실에는 유령이 산다. 합리성의 시대, 다시 말해 합리적으로 살고 있다고 믿는 시대의 유령은 개인의 차원에서 작동하고 그 유령은 스스로 합리적이라 믿는 상태에서 벌어지는 인간의 미래에 대한 징후이다. 자신의 확신과 합리적이라는 믿음이 하나가 되어서 오히려 우리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세계로 흘러든다. 그것이 어쩌면 자본이 꿈꾸는 세계인지도 모른다.
여전히 나는 영화 안에서 이해되지 않는 장면들, 사소함이라 불릴 수 있는 장면들 그것이 세계에 대한 어떤 실마리로서 기능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라오스>는 모두 6장으로 구성된 영화다. 그중 마지막 6장의 제목은 ‘모든 길은 한 곳으로 통한다’이다. 이는 주역의 계사전 ‘천하가 돌아가는 곳은 같되 길이 다르며, 이르는 것은 하나지만 백 가지 생각이 있다(天下同歸而殊途, 一致而百慮)’ 와 같은 의미처럼 보인다. 그 길과 생각은 다르지만 결국 그것들은 한 곳으로 통한다는 것, 그래서 라오스의 이름 모를 어떤 음악을 배경으로도 현철은 언젠가 그곳으로 돌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 <라오스>가 자본주의 세계 내에서 작동하는 합리성이라는 믿음에 대한 혐오를 지니고 있지만, 우리는 아직도 여전히 그곳에 도달하지 않았고 여전히 길 위에서 서성이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