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
[초이스]기념촬영
정윤철, 1997
한 무리의 여고생들이 저들끼리 사진을 찍으려다 지나가던 한 남자에게 촬영을 부탁한다. 그리고 통역이 없으면 알아듣기 힘든 여고생들의 감탄사가 이어진다. 오빠라고 부르기엔 나이가 많아 보이는, 아저씨라고 부르기엔 죄송한… 사내가 셔터를 누르려고 하자 아이들은 다시 괴성을 지르면서 손으로 브이 자를 그리고 까치발을 든다. 화면이 어두워지면 뜨는 제목, 기념촬영. 마지막이 되어버린 한 장의 사진.
정윤철 감독의 단편영화 <기념촬영>은 1994년 10월 21일 아침, 어이없이 무너져버린 성수대교 참사를 사건의 중심에 놓고 그 시간에 있었던 두 여고생의 엇갈린 운명을 그린다.
영화가 시작되면 카메라는 두 여고생의 뒷모습을 따라 등굣길을 비춘다. 그리고 이어지는 다정한 대화들. “(…) 내 다리 날씬해진 것 같아?”, “하나도 아니다, 진짜 아니다.”, “너 치마 또 접었지?”, “그래 접었다.”, “우유 또 마셔?”, “내가 우유 마시고 싶어서 먹는 거냐, 키 크라고 엄마가 주니까 먹는 거지, 남의 속도 모르면서…”, “인스테드 오브 뭐뭐를 대신에, 프롬 타임 투 타임 때때로, 같은 뜻이 뭔지 알아?”, “썸 타임-”, “어 맞았어. (…)” 길을 걷던 중 수진은 미술수업 준비물인 스케치북을 빠뜨리고 왔다면서 친구 소연을 먼저 버스에 태워 보낸다. 성수대교로 향하는 버스, 그리고 집으로 되돌아가는 수진.
영화는 1997년 7월 3일, 1급 교량으로 탈바꿈한 성수대교 재개통의 날과 ‘사회적 살인’이 벌어졌던 그 날의 아침을 오가며 우리 사회가 어떻게 한 개인의 평화로운 일상을 무참히 부숴버린 뒤 망각의 시간을 경험하게 되는지 보여주고, 두 여고생이 나눈 우정의 시간과 이별의 순간을 비통한 심정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20여 년이 흐른 지금, 한국 사회는 더 나아졌을까. 또는 더 안전해졌을까. 우리가 망각하는 사이 내 이웃과 친구의 죽음은 단지 나쁜 운을 맞이한 타인의 것이 되었고 그것을 무기력하게 바라보는 동안에 우리 사회는 더없이 사악하고 악랄한 구조가 되어버렸다. 이 러시안룰렛과 같은 게임에 제 운명을 맡기는 것이 당연한 삶이 되어버린 지금, 이대로 가만히 있을 것인가, 라는 질문과 맞닥뜨릴 수밖에 없다.
자,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그 열쇠는 다시 우리에게 주어졌다. 내 귓전에는 아직도 살아있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생명력 넘치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맴돈다. 그래 넋이여 참담한 운명이여 승천하지 말고 이승을 떠돌아라. 세상이 뒤집힐 때까지 우리와 함께 있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