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
[초이스]서울역
배윤호, 2013
어떤 공간은 이상한 감흥을 줄 때가 있다. 눈 앞에 펼쳐진 모습뿐만 아니라 그 이전에 그리고 이후에도 있음 직한 일들이 한꺼번에 다가올 때가 있다. 한 장의 사진이 다른 사진과 겹쳐지고 또 겹쳐지다 문득 그 모든 사진에 존재하는 그 공간이 영혼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그래서 공간에 대한 다큐멘터리는 매번 흥미롭다.
<서울역>은 서울역사가 옛 모습으로 복원되어 복합문화공간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을 담고 있다. 영화는 무언가를 긁어내고 털어내고 조이고 닦고 칠하는 손길과 함께 서울역이 만들어질 때의 사진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과거와 현재의 과정들이 영화의 시간 안에 나란히 들어온다. 그리고 과거 서울역의 모습이 담긴다. 역사 앞까지 들어찬 차들로 그곳으로 오려는 사람들의 마음이 담긴 사진, 이미 수없이 봤을, 표를 구하려고 밤을 새우고 있는 사람들의 사진이 보인다. 그리고 다시 현재의 공사현장이 보인다. 공사비를 가지고 실랑이하는 관계자들이 보이고 노동자들이 체조하는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한 노동자를 따라 공사현장으로 들어가고 노동하는 손길이 몽타주로 담긴다. 사는 게 제일 고단하다며 말을 거는 조선족 노동자를 시작으로 이미 현장을 떠났어야 하는 나이인 전기기술자가 이제는 현장에 있을 기술자가 없다고 이러다 로봇이 와서 할 거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는 무심하게 복원작업을 하는 다양한 노동자의 노동하는 모습이 담긴다. 이것을 그냥 복원과정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은 카메라가 노동의 내용과 성격을 담아내려 했기 때문이다. 노동의 움직임과 노동의 고단함이 담겨 있다. 그리고 그 노동을 하는 사람들이 이야기한다.
그 이야기 속에는 높은 사람이 시찰 오는 날에는 공사현장에 종이로 카펫을 깔고 평소에는 신경 쓰지 않던 안전을 챙기는 현실을 꼬집기도 하고 장성한 자식들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기도 하다. 그러면서 조금씩 노동자 한 사람씩이 눈에 들어온다. 조선족 노동자, 전기 기술자, 베트남에서 온 이주노동자들이 보인다. 그러나 영화는 계속 무심하게 현장의 일상을 담고 있다. 점심을 먹고 일을 하고 잠시의 수다를 나누는 모습이 담긴다. 그리고 이야기는 좀 더 나아가 서울역의 역사, 개인들이 가진 역사관의 차이, 공사과정의 잘못된 부분이 담기고 자식들의 취업난과 멀어지는 자식들에 대한 섭섭함이 담긴다. 그렇게 영화는 그들의 일과 그들의 삶까지 기록된다. 그러는 동안 서울역은 조금씩 옛 모습을 찾아가고 개관기념 전시를 위한 전시물들이 들어온다.
<서울역>을 보다 보면 이 공간의 주인이 누구인지 묻는 순간들이 있다. 전기공사를 하는 노동자는 접지가 얼마나 중요한데 그게 안 되어 있는 공사에 대해 카메라에 슬쩍 이야기하고 페인트칠하는 노동자는 몰딩의 공정이 이상해 나중에 보기 싫어질 거라 이야기하고 ‘높은 양반’이 시찰 와서 아침에 계획했던 일을 미뤄야 하는 답답함을 이야기하고 공사가 다 끝나서 2년 가까이 오던 곳을 내일모레면 오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이상하다고 이야기할 때다. 그리고 그 물음의 정점은 개관식이 진행될 때다. 식장에는 ‘높은 양반’들이 그득하고 밖에는 아직 공사가 끝나지 않아 일을 하던 노동자들이 개관식 때문에 일을 멈추고 역사 밖 화단에 앉아 역사 안 개관식을 지켜본다. 감독은 안과 밖을 교차 편집한다. 너무 노골적이긴 한데 가끔은 노골적일 때 진심이 더 진심 같아 보일 때가 있다.
시간이 흘러 겨울이 되었다. 여전히 사람들은 지나간다. 거리에는 눈이 내린다. 그 공간에 흘렀던 시간의 수만큼의 눈발이 날리며 영화는 끝난다. 하지만 눈밭에 글을 쓰듯 영화는 또렷한 질문을 했다. 복원이란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그리고 공간의 주인은 누구인지, 공간으로 무엇을 표현할 수 있는지 그리고 예술은 무엇인지 우리에게 묻는다. 우린 뭐라 대답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