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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이스]거인

김태용, 2014

[초이스]거인 대표 이미지

오밀조밀하게 바닥에 깔린 마을로 거꾸로 몸을 떨구는 사람의 포스터 한 장, 그리고 욕조에 담긴 그득한 물에 간신히 눈코입만 내놓고 누워있는 사람의 포스터 한 장. ‘사는 게 숨이 차요’ 포스터와 카피가 인상적인 이 영화는 사는 게 숨이 턱 밑까지 차오를 만치 버거운 한 소년의 이야기이다.

영재는 부모님이 살아있지만 가정에서 사는 것이 어려워 그룹홈으로 들어와 사는 고등학생이다. 시설에서 살기에는 나이가 꽉 차 이제는 나가야 하지만 영재에게는 돌아갈 곳이 없다. 교회 돈만 노리는 술주정뱅이 아버지와, 거울을 보는 것 같은 불쌍한 동생이 살고 있는 곳은 영재에게, 본인 스스로 걸어 나온 순간부터 더 이상 집이 아니다. 그런 영재가 지내는 그룹홈 ‘이삭의 집’은 그에게 유일한 안식처이지만, 그곳에서조차 그의 안락을 방해하는 것들이 나타나 그를 편히 놔두지 않는다. 그런 상황에서 영재는 살아남기 위해 무언가 끊임없이 해야만 한다.

영재는 새벽과 밤에 조용히 움직인다. 처연한 색감과 냉랭한 공기가 그의 상황과 어우러진다. 가냘프게 떨리는 핸드헬드로 촬영된 화면에서 그의 삶의 불안과 불편이 오롯이 느껴진다. 그는 이삭의 집 창고에 보관되어 있는 신발을 훔쳐다 학교에서 팔고, 자신이 왜 이곳에 있어야 하는지를 어필하기 위해 사람들에게 말하는 이유 아닌 이유는 점점 거짓말이 되어간다. 영재가 “신부님이 되고 싶다, 그러려면 여기에 남아야 한다”고 하는 말이 사실은 ‘신부고 성당이고 쥐뿔도 관심 없지만 내가 살려면 신부가 되어야 한다’라도 누가 이 소년의 거짓말을 멈추게 할 수 있겠는가.

극의 후반부로 가면서 영재의 삶이 더욱 지리멸렬하고 절실해질수록 누군가 “너는 왜 여기에 있어야 하냐”고 물으면 그는 외운 것처럼 대사를 던지는데, 그 말을 하는 그조차 그 말의 목적을 완전히 잊은 것처럼 보인다. 그에게 남은 단어는 ‘생존’밖에 없다. 영재를 구원해줄 것만 같은 인물들이 몇 등장하긴 하지만, “네 말에 속지 않았으면 좋겠다, 네가 말하는 대로 살았으면 좋겠다”라고 조언하는 예쁜 선생님조차 그를 도와줄 수 없다.
 
영재와 범태
영재와 범태

김태용 감독의 영화에서는 휘두르려는 자와 휘둘리는 것처럼 보이는 자로 구성된 관계가 자주 등장한다. 세고 거칠게 한쪽이 한쪽을 제압하고 휘두르려는 것 같아 보이지만 결국 이 관계 속에서 깨달음을 얻고 지는 쪽은 결국 휘두르려고 한 쪽이 된다. 가장 약한 최하위의 인물들이 서로 부딪히고 보듬으면서 한 줄기 빛도 없을 것 같아 보였던 그들의 삶에서 돌파구를 찾아 나가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도 역시 그렇게 힘들게나마 영재를 계속 살게끔 부추기는 것은 어른들 중 그 누구도 아닌 같은 처지의 동생 민재, 그리고 같은 그룹홈의 친구 범태이다.

동생 민재를 윽박지르고, 그룹홈 내에서 여우 짓으로 얻어낸 신뢰를 무기로 범태를 무시하는 영재가 얼핏 그들을 휘두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영재를 가르치며 그를 삶으로 인도하고 있는 것은 반대로 그들이다. 원장아빠의 압박에 이삭의 집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해 길거리로 내몰렸을 때 그가 전화를 건 것은 먼저 집을 나간 범태에게였고, 자해소동을 벌인 뒤 성당에 갔을 때도 영재의 눈앞에 나타난 것은 범태였다. 범태는 영재가 궁지에 몰려 바닥을 치고 있을 때 어김없이 등장해 영재가 벌인 일들을 돌아보게끔 한다. 자신보다 더 깊게 바닥을 치며 살아가는 범태로부터 영재는 꾸짖음과 동시에 위로를 받는 듯하다.

마지막 순간까지 영재는 민재를 보살핀다. 영재가 부모님의 무책임에 치를 떨면서도 누군가에게 똑같이 무책임할 수 없는 이유는 자신과 똑 닮은 민재이다. 동생을 자신처럼 만들고 싶지 않은 연민이 그를 더 나쁘게 만드는 것을 막고 있는 아이러니인 것이다. 온갖 불행을 다 떠안은 것 같고 삶은 힘들기만 한데, 또 끝까지 견디어내고도 싶다는 것이 안타깝다.

영화 안에서 주인공은 영재이지만, 누구든 영재처럼 때로는 폭발하며 때로는 꾹 눌러 참으며 누구에게도 도움을 기대하지 않은 채 서로에게 부대끼며 살아간다. 영화의 마지막, 떠나는 차 안에서 조용히 창밖을 바라보며 울음을 삼키는 영재를 보며 작게 한숨을 지어본다. 영화의 시작부터 내내 차오르던 숨이 터지며 가슴이 먹먹해지다가 다시금 숨이 차오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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