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
[초이스]여름의 끝자락
곽새미,박용재, 2015
케이 기본스라는 미국 작가가 쓴 「엘렌 포스터」라는 책이 있다. 작가의 출신 지역인 미국 남부의 노스캐롤라이나가 배경일 법한 조용한 시골 마을을 무대로, 지독하게 냉소적인 고아 소녀 엘렌이 여러 위탁가정을 돌아다니며 암담했던 과거를 회상하고 새로운 환경을 받아들이며 조금씩 행복해지는 준비를 한다는... 그런 이야기다. 고전적인 구조의 성장담인데 1인칭 내레이터로 등장하는 주인공 엘렌의 말투와 성격에 아주 그냥 매력이 철철 흘러넘쳐서 책장 넘기는 맛이 있는 그런 꿀잼의 책이었다.
어렸을 때, 그러니까 이십 대 초중반, 걸신들려 먹어치우듯이 책을 읽던 어린 시절에 한동안 몰입했던 장르의 책들이 있었는데, 앞서 언급한 미국 남부의 덥고 갑갑하고 헐벗었으면서도 보수적이기 짝이 없어서 왠지 변태적인 분위기까지 풍기는 동네를 배경으로, 보이기엔 과묵해도 머릿속으로는 재치 있는 수다쟁이인 주인공 소년/소녀가 1인칭 내레이터로 등장해 자신과 주위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식의 성장담이었다. 분위기는 미묘하게 다르지만, 대체로 이런 배경과 무드의 소설을 남부 고딕(Southern Gothic)이라는 하위장르로 통칭하여 부르곤 하는데, 여성작가 위주로 예를 들자면, 플래너리 오코너나 카슨 매컬러스, 유도라 웰티의 이름이 대표적이다. 참, 하퍼 리의 「앵무새 죽이기」도 고딕 문학의 대표적인 케이스. 남자 작가의 책이지만 비교적 최근에 영화로 만들어져 아카데미상 후보까지 올랐던 남부 고딕 소설로는, 「윈터스 본」이 있었다. 그래, 맞다, 제니퍼 로렌스가 스타로 발돋움했던 그 무시무시하게 암담한 스릴러 영화의 원작.
잡설이 길었다.
정리하자면, 내가 <여름의 끝자락>이라는 영화를 굳이 시간을 들여 이곳에 소개하는 이유는 이 영화를 보면서 마치 미국 남부 고딕 문학 앤솔로지에 실려 있는 짜릿한 단편 소설 하나를 읽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수 시몬스’라는 낯선 이름의 여성작가가 데뷔 단편집으로 내놓은 책의 대표 단편 같은 느낌? 아마존닷컴과 각종 북클럽, 네임드 작가들의 추천작으로 선정될 만한 고른 완성도를 가진 단편들이 실린.
그런데 정작 이 영화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작은 섬마을, 엄마의 가출 후 의지할 곳 없이 외롭게 지내는 주연. 하지만 그런 외로움도 가장 소중한 친구 경희가 있어 견딜 수 있다. 주연과 경희는 언제나 함께 지낸다. 행복한 두 친구의 일상에 갑자기 전학생 소영이 나타난다.’
영화제 리플렛에 실린 이 소개글로만 봤을 땐 (정확한 설명이지만 어쩔 수 없이 식상해 보이는) 정리 탓에 쉽게 무시해버리는 종류의 영화처럼 보인다. 그런데 정작 영화적인 분위기는 거의 딴판이다. 덥고 갑갑한 여름의 분위기를 캔버스에 찐득하게 깔아놓고, 투견장에서 한몫 챙기려는 불쾌한 아버지들과 불법 약물을 주사해 무시무시하게 흥분한 개들이 마구 짖어대는 그곳에서 소녀들은 진지한 삼각관계 멜로드라마를 땀 흘리며 펼치고 있는 형국이다. 물론, 이중엔 병약한 여자친구 캐릭터도 기필코 등장한다. 이 영화에서 그 역할을 맡은 소녀는 당뇨를 앓고 있어 조금만 무리하게 움직여도 픽픽 쓰러져 정신을 잃는 터라, 주인공 소녀가 대신 놓아주는 인슐린 주사로만 살아남을 수 있다. 영화의 후반부는 예상대로 비극이다. 총소리가 들리고, 피가 흐르며, 시체가 등장한다.
갑갑하고 더운 여름, 무시무시한 폭력에 노출된 소녀들, 삼각관계 멜로드라마, 집착과 배신, 서러운 고함과도 같은 울음소리... 여름의 끝자락. 여름의 꼬리. 와, 내가 좋아하는 고딕 문학의 뜨거운 재료들이 다 들어가 있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 주인공 소녀를 연기한 ‘윤금선아’라는, 한 번 들으면 잊을 수 없는 이름을 가진 배우의 카리스마는 거의 신기할 정도로 강렬하다. 영화 전체를 혼자서 짊어진 채 오르락내리락하는 존재감을 쉴 틈 없이 과시하는데, 저 위의 스틸 사진이 나오는 신의 경우는 “난 이 영화의 심장이자 코어이며, 이 이야기가 노리고 있는 과녁의 텐포인트이면서, 빗나가는 화살을 기필코 과녁 안으로 끌어들이는 힘의 원천이다!” 라고 소리치고 있는 당당한 주인공의 얼굴을 보여준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이 영화의 제목을 그냥 <윤금선아>라고 해도 어울릴 것이다.
「엘렌 포스터」가 어쩌니, 미국 남부 고딕 문학이 저쩌니, 잘난 척하면서 시작한 다소 수상쩍은 소개글이었지만, 결국 이 영화를 누군가에게 추천하게 된다면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을 것이다. 암담하고 폭력적인 환경 속에 노출된 여자 주인공이 강렬한 자존심과 잊을 수 없는 존재감을 과시하며 영화 전체를 이끌고 나가는 작품을 단편에서든 장편에서든 좀 더 많이 만나고 싶다는 것, 그런 영화가 뭐가 있냐는 질문을 이어받는다면 이 영화를 예로 들 만하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