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
[초이스]이야기의 역사, 역사의 이야기
김하경 달린, 2014
<이야기의 역사, 역사의 이야기>는 ‘에네껜’이라고도 불렸던, 멕시코 한인 이주노동자들의 이야기이다. 하지만 그들의 이야기라고 하기에 영화가 주는 역사적 정보는 매우 한정적이다. 제목이 암시하듯 영화는 ‘이야기’ 자체를 대상으로 삼아 역사를 이루고 전달하는 이야기, 즉 발화의 속성을 탐구한다. 한복 차림에 상투를 틀었지만 얼굴이 보이지 않는 등장인물은 집단의 특성을 상징화한 이미지이며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의 형태로 들리는 목소리는 화면 안 인물의 것인지 누구의 것인지 명확하지 않다. 개인의 기억이 집단의 역사가 되는 지점을 영화는 이렇게 정체성이 불명확한 개인과 주인을 알 수 없는 목소리라는 설정으로 보여준다. 영화에서 이야기를 하는 목소리는 역사를 서술하는 기표로서가 아니라 말이 지닌 지시의 모호함과 유동성을 전면에 드러내는 도구가 된다. 스페인어와 한국어를 번갈아 사용하는 내레이션은 함께 등장하는 자막과 함께 두 언어의 다른 어순과 느낌을 상기시키며 발화 당시에도 있었을 혼란과 그에 따른 역사 왜곡의 가능성을 암시한다. 영화는 말과 문자의 시청각적 유희를 통해 관객의 인식 안에 선형적인 이야기가 자리하는 것을 끊임없이 방해한다.
인물이 과거를 재연하는 비현실적인 무대와 그 무대를 둘러싼 스크린 안의 작은 프레임등의 시각적 장치는 거듭되는 간접화법을 구사하는 목소리와 함께 우리가 역사라고 부르는 이야기가 중첩된 매개의 결과물임을 이야기한다. 내레이션에서 계속 사용되는 ‘우리 나라’와 ‘이 나라’, ‘여기’와 ‘저기’등 한국어 특유의 지시어들이 주는 모호함은 분할 화면을 통한 ‘여기’와 ‘저기’의 풍경으로 시각화된다. 이러한 시청각적 요소를 통해 이야기에 대한 탐구를 하는 동안 관객들은 ‘에네껜’들에 대해 단편적인 정보를 얻게 된다. 그들이 제물포항을 떠나 멕시코에 가서 에네껜이라는 선인장 베는 일을 했다는 것, 갈 수 없는 고향을 그리워했다는 것 등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강하게 각인되는 것은 그들이 갖고 있던 이중적 정체성에 대한 혼란과 슬픔이라는 집단적 정서이다. 그 정서와 그에 기반한 단편적 정보의 다층성과 모호성을 목격하며 우리는 같은 기표로 이루어진 ‘역사’와 ‘이야기’의 차이를 질문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