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
[초이스]어니 비스킷
아담 엘리어트, 2015
<메리와 맥스>(2009) 이후 6년 만에 애덤 엘리엇 감독의 단편 애니메이션 <어니 비스킷>(2015)이 완성됐다는 소식을 접하고 진작부터 가슴이 설렌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감독의 신작은 역시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어니 비스킷>은 감독의 전작들과 다름없이 사회적 약자로 살아가는 장애를 가진 캐릭터가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색감을 제거한 흑백 화면의 차분한 정서와 미니멀한 연출 스타일도 그대로 이어진다. 간결하고 명료한 스토리와 함께 희비극이 교차되면서 드라마와 유머를 맛깔나게 그려냈던 감독의 독특한 시선이 이번 작품에서도 고스란히 전사된다.
이야기의 시작은 1960년대 파리를 배경으로 펼쳐진다. 외롭고 쓸쓸하게 살아가는 파리지앵 어니 비스킷은 박제사이다. 어니의 아버지, 그리고 아버지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어니는 후천적 청각 장애인이다. 어린 시절 여름 캠프에서 만난 어느 고약한 아이의 장난으로 영원히 들을 수 없게 된다. 이런 어니의 기구한 운명은 어쩐지 감독의 작품들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불운의 아이콘들과 많이 닮아 보인다. 그렇지만 이런 암울한 어니의 유년 시절에도 네넷이라는 옆집 소녀에 대한 행복한 기억이 있다. 새를 좋아하고 머리에서 계피가루 향이 나는 네넷은 세상에서 유일하게 어니를 지지하고 이해하는 친구이자 그의 첫사랑이다. 어니는 늘 그녀와 베니스행 신혼여행을 꿈꾸며 풋풋한 첫사랑을 키워나간다. 그러나 행복도 잠시뿐, 독일 침공과 동시에 유대인이었던 네넷과 그녀의 가족은 하루아침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어니의 첫사랑은 그렇게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세월이 훌쩍 지나 노년이 된 어니, 네넷이 남기고 간 오리와 단둘이 외롭게 살아가고 있다. 그런 어니 앞에 죽은 비둘기가 우연히 떨어지게 되고, 이를 계기로 어니는 아주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첫사랑의 옛 추억을 떠올리며 그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용기를 내어 베니스행을 감행한다. 그런데 인생이란 게 늘 계획한 대로 될 리가 만무하다. 특히 꼬일 데로 꼬인 지지리 운도 없는 어니의 인생이 그렇게 쉽게 술술 풀릴 리가 없다. 그토록 꿈에 그려왔던 베니스 대신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황량한 호주의 오지 마을뿐. 여기까지의 스토리 전개와 캐릭터가 어쩐지 그의 또 다른 단편 <하비 크럼펫>(2003)을 닮아있다. 그런데 이번에는 뭔가 달라졌다.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였던 이전의 수동적인 캐릭터들과 달리 어니는 용기를 내어 스스로 뭔가를 쟁취하고자 노력한다. 인생이란 게 전적으로 우리가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모든 게 운명에 달린 것도 아니기에...
이번 작품은 여러모로 감독의 전작과는 확연히 다른 텍스처를 드러내는 실험적인 시도들을 보여준다. 물론 감독의 시그니처인 흑백 화면과 전통적인 스톱모션 기법 그리고 내레이션 등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간결한 스토리와 모노톤의 화면, 희비극이 교차하는 캐릭터가 가장 어둡고 드라마틱한 정서를 건드리며 동시에 유머를 머금고 있는 아이러니한 조화를 생산하는 것도 여전하다. 그런데 이번에는 전반적인 작품의 톤이 눈에 띄게 가벼워졌다. 감독은 본래 장편으로 기획된 시나리오에 25번이나 수정을 가할 만큼 시간과 열정을 쏟았으며, 작품이 주는 역동성과 리듬을 그대로 살리기 위해 단편 애니메이션으로 전환했다는 후문이다. 또 다른 변화의 시도는 바로 캐릭터에 있다. 캐릭터들이 한층 더 풍부해진 질감과 왜곡된 아름다움 그리고 성격화를 드러내고 있다. 감독은 자신이 창조한 세계의 캐릭터들과 늘 충분한 교감을 이룬 후 작업을 진행해 나가는 편인데, 이런 이유로 작품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이 단순히 클레이로 만들어진 인형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감독의 삶 속에 존재하는 실재처럼 다뤄진다. 특히, 어니의 새로운 인연으로 등장하는 앤젤리나라는 캐릭터를 통해 감독은 스스로의 변화를 상징적으로 반영한다. 연약하고 깨지기 쉬운 감성을 지닌 이전의 캐릭터에서 보다 단단하고 강한 캐릭터로 진화해 나가는 모습을 새로운 캐릭터를 통해 역력히 드러낸다. <메리와 맥스> 이후 정신적, 육체적으로 방전됐다던 감독의 창작 세계가 이 작품을 통해 완전히 에너지를 재충전한 것처럼 보인다. 미니멀한 스타일이 보여주는 미학과 번뜩이는 재담은 한층 더 긍정적이고 유쾌하게 진화했다.
애덤 엘리엇이 세상을 향해 던지는 인생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위트에 또 한 번 두 엄지손가락을 치켜들 수밖에 없다. 조급한 감이 없지 않지만, <하비 크럼펫>, <어니 비스킷>에 이어 제작될 예정인 단편 3부작의 완결편을 어서 빨리 만나 볼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