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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이스]나쁜 나라

김진열,정일건,이수정, 2015

[초이스]나쁜 나라 대표 이미지

이곳에 글을 쓸 때는 다큐멘터리 감독으로서 어떻게 하면 다큐멘터리의 매력을 전달할 수 있을까 고민한다. 다큐멘터리 제작 과정에는 아찔할 정도로 흥미로운 순간들이 있다. 통제할 수 없는 현실 속에서 감독은 매 순간 결정해야 한다. 무엇을 찍을지, 누굴 만날지, 어디로 갈지, 어떤 장면을 넣을지, 그 장면을 어느 정도 넣을지, 어디서 아웃 할지 등 모든 순간이 결정의 연속이다. 미리 결정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심지어 누가 주인공이 될지도 마지막에 결정되곤 한다. 다큐멘터리 제작의 흥미로운 순간을 통해 사람들을 매혹 시킬 수 있다면 소재를 중심으로 달라지는 다큐멘터리 관객층을 넓힐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나쁜 나라>는 시작부터 어려웠다. 제작자들의 면면을 알기도 하고 편집 과정을 가까이에서 봤기에 제작 과정의 매력을 전달하기 쉬울 줄 알았다. 하지만 세월호 참사를 제대로 볼 용기, 참사를 둘러싼 현실을 직면할 용기, 무엇 보다 그 부모들을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애도해야 할 시간에 분노할 수밖에 없었기에 여전히 나를 포함해 누군가는 눈물을 흘린다. 또 다른 누군가는 분노가 체념이 되어 가슴 속 깊이 눈물을 묻어 버린다. 그러나 이 글을 쓰기로 했으니 <나쁜 나라>가 가지고 있는 매혹에 대해 이야기해야겠다. 가 편집본까지 하면 세 번을 봤다. 볼 때마다 힘들었지만 볼 때마다 새로운 것이 보이는 이상한 영화다. 

<나쁜 나라>는 세월호 참사로 아이를 잃은 부모들의 1년간 투쟁을 담고 있다. 2014년 6월 초 국정조사 특별위원회가 팽목항에 찾아온 순간부터 영화는 시작된다. 세월호가 침몰하는 모습도 부모가 울고 있는 모습도 아니다. 부모들이 부딪쳐야 하는 현실로부터 시작한다. 하지만 처음에는 그 현실이 보이지 않는다. 무게를 가늠할 수 없는 슬픔을 짊어지고 있는 부모들만이 보인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아무 생각이 들지 않는다. 부모들은 꿈에 아이가 나와 하루가 기분 좋았단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아이의 사진을 보면서 그날그날 아이의 기분이 달라 보인단 이야기를 하기도 하며 사무친 그리움을 토로한다. 그들의 표정과 말에서 배어 나오는 슬픔에 관객은 압도된다. 뜻 모를 정막함과 슬픔을 따라 같이 울게 된다. 그것이 소리 내어 나오는 울음이든 가슴 속에 흐르는 울음이든 무엇이든, 같이 울 수밖에 없다. 그렇게 영화가 끝이 나면 거대한 슬픔과 분노에 멈춰 섰던 생각과 기억이 온전히 하나의 감정이 된다. 깊은 애도. 깊은 애도를 할 수 있는 사람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 필름 테라피라고 하지 않던가. <나쁜 나라>는 슬픔을 담고 있지만 보는 이에게 그것을 넘어설 힘을 주는 영화이다. 깊이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 감정을 담고 있다. 개인에게 일어나는 사건은 그 개인에게는 특수한 사건이다. 하지만 다큐멘터리 제작자들은 특수한 사건을 보편적인 감정으로 끌어 올린다. 그래야 더 많은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촘촘하게 짜여있는 장면과 장면은 세월호 참사의 슬픔이 우리 모두의 것이고 당신도 피해 갈 수 없는 슬픔에 힘겨웠겠다고 말한다. 그것만으로 고맙다. 그렇게 한번 보면 된다. 

그리고 다시 보게 되면 다른 것들이 보인다. 너무나 잔인한 한국의 현실과 슬픔을 견디며 우리 모두를 위한 투사가 되어 가는 부모들이 보인다. 시작부터 보여주는 국정조사 특별위원회는 그냥 들어간 것이 아니었다. 처음 부모들은 슬픔 속에서도 기다리는 시민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변해 간다. 안전행정부 장관, 해양경찰청장, 국방부 장관, 특별위원회 간사, 대통령 비서실장, 정부 관계자 누구 하나 책임 있게 사고에 대해 이야기하지 못한다. 부모들은 형식적인 답변과 변명으로 일관하는 정부 관계자의 모습에서 진실규명의 의지를 찾지 못한다. 믿을 곳은 시민이라고 판단한 부모들은 특별법 제정을 위한 서명을 받기 위해 전국을 누빈다. 진실을 알지 못하면 아이들을 가슴에 묻을 수도 없다며 손을 내밀고 시민들은 내민 손을 잡아 준다. 부모들은 국회 앞 농성, 단식, 광화문 농성, 도보 행진을 한다. 하지만 야당은 여당의 높은 벽을 이야기하고 국회 앞마당에서는 제헌절 행사로 음악회를 연다. 현실은 잔인하다. 잔인한 현실을 견디며 부모들은 변한다. 처음에는 경찰이 막아서면 주저앉아 어찌할지 몰라 하던 부모들은, 일손을 멈추고 응원하는 시민들에게 어린아이들의 응원에 고맙다고 답하며 용기를 낸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진실 규명만이 아니다. 안전한 사회를 위한 특별법 제정이다. 부모들은 그렇게 우리 모두를 위한 투사가 된다. 여전히 법적 책임을 지는 정부 관계자가 한 명도 없는 현실에서 그들은 여전히 거리에 있다. 한국 사회의 민낯을 기록한 영화는 이제 관객에게 이야기한다. ‘지금 유가족의 투쟁이 있어 우리는 좀 더 안전한 미래를 맞을 수 있다고. 그러니 이제는 당신이 움직일 때라고. 더 안전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그리고 한 가지 더 보였으면 하는 것이 있다. 한때 공중파 방송국에서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류의 프로그램이 만들어진 적이 있었다. 이를 보고 독립다큐멘터리의 생명은 다한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를 하던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자신의 목소리를 널리 알릴 수 있는 채널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목소리를 담아 닿지 못하는 곳에 전하는 것이 독립다큐멘터리의 역할이다. 그래서 종종 독립다큐멘터리는 오해를 받는다. 그냥 전하는 역할만 한다고. 하지만 그대로 전하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제작자들은 그들의 목소리에 공명하고 사회에 전달할 메시지를 찾을 때에야만 움직일 수 있다. 그리고 그런 그들에게 자신의 목소리를 들려주는 주인공들이 있어야 한다. 그 과정은 서로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그 믿음은 오랜 기간 독립다큐멘터리가 지켜 왔던 자리에서 비롯된다. 3사 공중파 카메라를 내치는 유가족들이 있다. 권력에 흔들리는 카메라에 누가 자신의 목소리를 나눠 주겠는가. 그런 이유로 <나쁜 나라>에서처럼 흔들리지 않고 자리를 지켜왔던 독립다큐멘터리 제작자들도 함께 봐주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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