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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이스]춘희막이

박혁지, 2015

[초이스]춘희막이 대표 이미지

방송 출신 독립PD들의 스크린 진출의 신호탄이었던 <워낭소리>는 상당한 잠재력을 가진 산업으로서 다큐멘터리의 가능성을 확인시켜 주었고 이에 따라 방송 출신 독립PD들의 작업에 대한 관심이 급증했다. 기존 한국의 독립 다큐멘터리 제작자들과 달리 극장 개봉 등을 통한 대중과의 만남에 적극적이던 이들 독립PD들은 각종 해외 영화제 초청 및 피칭 프로젝트 참여 등을 통해 영화를 홍보하고 해외자본을 끌어오는 노하우를 일찌감치 터득했을 뿐 아니라, 대중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내는데도 뛰어난 감각을 발휘했다. 이것은 확실히 기존 한국 독립 다큐멘터리 제작자들의 방식과 태도와는 상당히 다른 것으로, 초기에는 제작 배경이 다른 이러한 다큐멘터리에 대한 불편한 감정들이 여과 없이 표출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성규, 박봉남, 이승준 감독 등 독립PD들의 작품이 해외 영화제에서 수상하는 등 이들의 지속적인 시장 개척 노력은 꾸준히 힘을 축적해 가고 있었고, 이러한 노력은 결국 5백만 관객 동원이라는 한국 다양성 영화 사상 최고의 흥행을 기록하게 된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로 이어진다.

<춘희막이>는 <워낭소리>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와 유사한 방식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이들은 제작방식의 유사성뿐 아니라 내러티브 측면에서도 소위 ‘시장에서 통하는 이야기’로서의 유사한 패턴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이 영화들은 현대의 대도시, 자본주의적 관계망에서 벗어난 깊은 산골이나 농촌을 공간적 배경으로 한다. 수십 년에 걸쳐 오랜 세월을 함께 해온 노인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는 점도 공통적이다. 이 세상에서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한계 상황은 내러티브를 경제적으로 조직하고 영화의 정서적 밀도를 높이는 데 효과적인 장치로 사용된다. 

‘노년’ ‘동행’ ‘운명’ ‘죽음까지 초월한 사랑’ 혹은 ‘우정’ 등 지극히 낭만적인 수사로 점철된 영화의 홍보 문구는 이 영화들의 정서적 소구점이 어디에 있는지를 분명히 보여준다. 이를테면 < Old Partner >라는 영문 제목이 붙은 <워낭소리>는 죽음을 눈앞에 둔 늙은 소와 역시 온갖 질병에 시달리는 할아버지의 오랜 동반자적 관계를 묘사하고 있으며,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는 오직 죽음에 의해서만 이별하는 시골 노부부의 지고지순한 사랑을 다룬다. <춘희막이>는 한 남자의 본처와 씨받이로 만난 두 여성이 할아버지가 사망한 뒤에도 오랫동안 모녀처럼, 자매처럼 혹은 친구처럼 의지하며 살아가는 기이한 동거 혹은 우정을 다루고 있다. 현실에서는 가능하지 않을 법한 인물들의 오랜 관계를 보여주는 이 영화들은 이들의 관계를 운명마저 초월한 낭만적 동반자의 관계로 거듭해서 묘사한다. 물론 이러한 요소는 많은 관객들을 사로잡은 정서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공동체의 유대감이 깨지고 가족은 해체되었으며 이해관계가 지배하는 현대사회에서 이러한 등장인물들의 삶은 자본주의적 소외를 벗어난 삶이 존재할 수 있다는 위무감을 줄 뿐 아니라, 나 역시 원한다면 그러한 삶을 선택할 수도 있다는 일종의 소망충족 혹은 대리만족 판타지로 기능한다.

중요한 것은 이 영화들이 다큐멘터리라는 사실이다. 이 영화들이 다큐멘터리로 호명되고 소비되는 과정은 이러한 판타지의 작동에 결정적인 요소가 된다. ‘이런 일이 실제로 존재한다니!’라는 감탄과 기쁨. 이런 점에서 ‘다큐멘터리’는 때로 현실을 보여주기보다는 오히려 현실에서 불가능한 것을 감추는 데 더 효과적인 장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허구가 아닌 현실’이라는 관객의 믿음에 의지해 허구보다 더 능란하게 판타지를 펼쳐 보일 수도 있는 것이 다큐멘터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트린 민하는 다큐멘터리가 “광적으로 조작적인 픽션”이라 했을 것이다. 

실제로 관객들이 이 영화들에서 보고 싶어 한 것은 다큐적인(현실적인) 삶의 모습이라기보다는, 반대로 현실에 부재한 것 혹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의 제작자들은 철저하게 비자본주의적, 전근대적 시공간에 놓인 사람들을 찾아 나서야 했다. 그러한 사람들은 우리가 잃어버린 것에 대한 향수와 판타지의 생산에 필수불가결한 조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이러한 삶은 현대 자본주의적 삶 안에서는 불가능하다. <워낭소리>나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춘희막이>의 등장인물들처럼 외딴 시골에서 살아가는 노인들에게도 자본주의적 삶의 양식은 이미 깊숙이 침투해 있다. 그것을 이 영화의 제작자들이 모를 리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혹은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들은 영화가 의도한 효과를 위해 등장인물들의 삶 속에 들어와 있는 자본주의적 흔적을 철저하게 지우고 배제하는 전략을 취한다. 관객이 원한 것은 비릿한 실제 삶의 풍경이 아니라 그들의 삶에는 부재하는 헌신과 낭만, 영원한 사랑 따위의 ‘상실된 가치’이기 때문이다. 판타지의 작동을 위해서 영화에 등장하는 사회적 배우로서의 노인들은 철저하게 현실의 때를 지우고 순수한 존재로 탈색되어야 한다. 이 영화들은 본질적으로 향수영화이다. 

이 영화들은 자본주의적 질서와 가치로부터 탈주하고 싶은 관객들의 욕망을 투사하는 공간으로 노인을 호명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노인의 삶을 타자화한다는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 일상의 생활인으로 살아가는 노인들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면 구태여 시골 오지에 사는 노인들을 찾아내 카메라 앞에 세울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가 원한 것은 현실이 아닌 판타지, 향수였기 때문에 이 영화들은 철저하게 노인들의 현실적인 삶의 한 측면을 감추고 낭만화, 미화되어야 했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노인의 타자화라는 결과로 나타난다. (여기서 노인의 타자화란 노인의 낭만화와 같은 맥락에 있다. 타자화는 등장인물들의 삶에 스며든 자본주의적 관계의 흔적을 지우고 ‘순수한’ 삶의 껍질만 남겨놓은 ‘낭만화’의 최종 결과이다.)
 
춘희막이

여하튼 ‘노년의 낭만화’라는 영화적 전략은 이 영화들이 죽음을 다루는 방식에서도 드러난다. 세속적, 자본주의적 관계의 흔적을 제거한 순수화, 낭만화의 최종 국면에 이르러 죽음은 이제 사회학적 사건이 아닌 신화적 세계의 사건으로 수용된다. 세속적인 이해관계를 초월한 등장인물들의 지고지순한 사랑과 상호 헌신은 죽음으로써만이 종결될 수 있는 이들의 운명적 동반자 관계를 강조한다. 그리고 이러한 죽음에는 비극적 숭고미가 부과된다. 

<춘희막이>는 <워낭소리>와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에서 반복되는 죽음의 미학을 반복하는 듯하면서 다른 길을 간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춘희막이>에도 물론 죽음은 등장한다. 친하게 지내던 이웃 노인이 죽었을 때 막이 할머니는 상여 행렬이 지나가는 길목에서 구슬피 울며 그의 죽음을 애도한다. 영화는 이웃 노인의 죽음을 통해서 이제 90세를 넘긴 막이 할머니를 비롯한 영화의 주인공들에게도 죽음은 곧 닥칠 사건이라는 점을 충분히 암시한다. 그러나 전작들과 달리 <춘희막이>는 영화의 마지막 순간까지 주인공의 죽음을 서사 안으로 끌고 들어오지 않는다. 영화는 죽음이라는 사건이 발생하기 전에 끝이 나고 결과적으로 죽음의 비극성보다는 ‘동행’의 느낌이 부각된다. 그것은 매우 신중한 선택이다. 사실 이 영화가 노인들을 소재로 영화를 찍겠다고 결정했을 때 어쩌면 제작자들의 구성안에는 이미 주인공의 죽음이 들어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상상은 그 자체로 불온하다. 비극적 숭고미는 죽음을 통해서 완성된다는 점에서 이러한 소재의 선택은 필히 죽음으로 종결되는 내러티브 결말을 상상하게 만든다. 그러나 좀 더 흡입력 있고 감동적인 서사를 위해 누군가의 죽음을 애타게 기다린다는 것은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그것은 결국 다큐멘터리 윤리와 직결되는 문제이다. 이제 90세가 된 노인을 카메라에 담기로 결심하고 2년간 촬영을 했을 때 <춘희막이> 제작진이 어디까지 이 영화를 기록하려 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가 본 영화는 그러한 죽음의 포르노그라피의 유혹을 벗어났다는 점에서 이 영화의 엔딩은 충분히 존중되어야 한다. ‘기대되는 죽음의 부재’는 결과적으로 이 영화의 흥행에 마이너스 요인으로 작용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선택은 이 영화가 포르노그라피적 천박함으로 전락하는 것을 막아주었다. 그리고 두 주인공의 일상에 우리가 더욱 집중할 수 있게 해주었으며 서사가 멈춘 뒤에도 계속될 주인공들의 삶에 지속적인 관심을 갖게 해주었다. 처음부터 예정된 길을 뻔뻔스럽게 가는 이야기에는 궁금증이 일지 않는다. 그러나 영화가 그 직전에 멈춰 서기로 결심한 순간 그러한 선택은 결말이 아닌 과정 자체에 집중하게 만든다. 나는 그러한 선택의 이유가 무엇이었든 앞으로도 한 방향을 바라보는 춘희, 막이 할머니의 얼굴을 오랫동안 기억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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