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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이스]소녀들

이성욱, 2011

[초이스]소녀들 대표 이미지

이성욱의 <소녀들>은 할머니와 손녀가 보낸 하루 반나절 동안의 일을 보여준다. 곱게 치장한 할머니가 손녀를 데리고 유원지를 찾는다. 그녀들은 산길을 걷다가 폐허가 된 동물원을 둘러보고 할머니의 친구와 이야기를 나눈다. 손녀가 나무 둥치에서 죽은 매미를 발견하고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태워주는 비행기 놀이기구를 탄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와 가발을 벗고 화장을 지운 할머니는 삶에 찌들고 지친 노인일 뿐이다. 그녀의 깊게 팬 주름과 쳐진 살갗은 손녀의 말간 얼굴과 대비되지만 아이 역시 편치 않은 시간을 견디고 있다. 엄마는 가출했고 아빠는 매일같이 만취한 상태로 집에 들어온다. 더 이상 자신을 키우기 힘들다는 할머니의 불평과 푸념을 못 들은 척 해야 한다. 이렇게 보면 어둡고 눅눅한 분위기가 예상되지만 이 영화는 매우 세심하게 조율된 색감과 카메라의 우아한 트래킹, 소녀와 할머니의 꿈을 표현하는 컴퓨터 그래픽의 사용, 몽환적인 일렉트로닉 음악으로 인해 꿈결 같은 색채를 입게 된다. 

이성욱은 녹록지 않은 삶의 민얼굴을 드러내는 집안과 가장(假裝)일지언정 일상의 허덕임에서 해방시켜주는 유원지라는 공간을 대비시킨다. 할머니는 괴로움에 빠져 딸의 양육을 뒷전으로 미룬 아들을 대신해서 보살펴야 하는 손녀가 버겁다고 말하지만, 아이의 몸을 씻기는 그녀의 지친 표정과 코를 골면서 잠에 빠져든 모습은 애처롭다. 한 프레임에 담긴 연약한 아이의 몸과 피로에 잠식당한 할머니의 주름진 육체는 성장을 향한 몸(미래의 소녀)과 소멸로 향하는 육체(과거의 소녀)를 체감하도록 만든다. 하지만 할머니는 고됨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인 산책길에서 수줍은 미소를 통해 사라져버린 소녀적 감성을 되살릴 수 있다. 또한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을 통해 손녀와 할머니의 유사성과 차이점을 병치시킨다. 동물들이 사라진 거대한 동물 우리에서 소녀는 할머니에 대한 생각을 들려주고, 손녀의 손을 잡고 산길을 걸으면서 할머니는 아이에 대한 속내를 드러낸다. 손녀는 “예전에 많은 동물들이 있었다”고 하지만 “그곳에서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 다고 고백한다. 할머니는 “집에 돌아가는 길에 혼자서 비행기를 타게” 되었고 비행기가 “생각보다 너무 높이 올라가 무서웠지만 그곳에서 보는 풍경은 상쾌했다”고 말한다. 손녀는 피로가 켜켜이 쌓인 집에 돌아와서 사라진 동물들을 상상하고, 할머니는 높은 곳에서 바라본 풍경을 마음에 새긴다. 아이가 볼 수 없는 공간과 할머니가 다르게 느낀 감정은 그들의 꿈 장면에서도 병치 되어 나타나 두 ‘소녀들’의 꿈과 소원을 이어준다. 아이는 할머니의 이야기에 등장하지만 실제로 볼 수 없었던 스케치북 속 동물들이 살아 움직이고 삭막한 집안이 초록색 풀들로 덮이는 꿈을 꾼다. 사라진 동물들이 불려 나와 알록달록한 색깔의 빛과 우거진 풀잎 사이로 움직이다가 반딧불처럼 반짝이는 빛들이 침대 위로 떨어지는 순간, 아이의 소망을 충족시킨 꿈은 할머니에게 전이된다. 낮에 만났던 할아버지와의 포옹이 반복적으로 재생되는 할머니의 꿈은 할아버지의 살갗과 닿음으로 인해 그녀의 피로와 늙어감에 대한 체념이 일시적으로 망각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주문, 혹은 육체를 통한 친밀함의 회복처럼 제시된다. 

<소녀들>은 10대 시절부터 영화를 찍어왔던 이성욱의 소년기 감성이 두 ‘소녀들’에게 이식된 영화다. 아파트로 둘러싸인 삭막한 도심지, 폐허가 된 동물원, 사람이 별로 찾지 않는 놀이동산, 거대한 숲을 가로지르는 케이블카의 그림자와 거센 바람 소리는 그녀들의 일상을 가능케 하는 환경이다. 이성욱은 ‘소녀들’의 고립과 적막, 오랜 시간 고여 있는 슬픔과 해소될 수 없는 울적함, 지나간 소녀 시절에 대한 그리움과 같은 현실의 고단함을 헤아려본 후 그녀들을 위로한다. “나비처럼 자유롭게 살고” 싶은 할머니의 소망과 손녀의 그림자놀이가 이어지고, 그녀들의 꿈을 긴밀하게 연결시킨다. 나아가 그는 동물원이 폐쇄되면서 사라진 동물들,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지워졌을 할머니의 희미한 미소에게 애틋한 시선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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