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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이스]항구를 떠나는 배

루이 뤼미에르, 1895

[초이스]항구를 떠나는 배 대표 이미지

<항구를 떠나는 배>는 놀랍도록 단순한 영화다. 영화는 하나의 숏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상영 시간은 50초에 불과하며, 영화에는 별다른 사건이나 이야기가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는 흑백이며, 심지어 사운드마저 없다. 하지만 이것은 <항구를 떠나는 배>에게 너무도 당연할 수밖에 없는 얘기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1895년에 만들어진 영화이고,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은 그 유명한 <열차의 도착>을 만든 뤼미에르 형제가 감독한 영화이기 때문이다. <열차의 도착>을 포함해 뤼미에르 형제가 찍은 수많은 단편 영상들은 모든 영화가 단 하나의 숏으로 구성되어 있고, 상영 시간은 1분을 넘지 않는 짧은 영화이다. 아니 어쩌면, 누군가는 이 영화들을 진정 ‘영화’라고 불러야 될 것인지에 의문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뤼미에르 형제가 찍은 영화에는 내러티브가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가 스마트폰으로도 충분히 촬영할 수 있는 일상의 풍경들을 촬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뤼미에르 형제가 촬영한 이 짧은 영화들은 그 역사적 의의를 제쳐두고서라도 충분히 아름답다. ‘영화 매체의 힘은 매체에 결함이 있기에 가능하다’라는 루돌프 아른하임의 말처럼, 뤼미에르 형제의 영화들은 현대의 기준으로 모든 것이 결함이 있기에 아름답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소리도 없고, 화면은 흑백이며 영화는 1분을 넘지 않고, 어떠한 극적인 이야기도 없으며, 단 하나의 숏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모든 결함이 바로 뤼미에르 형제의 영화를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다. 

그 중에서 뤼미에르 형제가 1895년에 만든 <항구를 떠나는 배>는 뤼미에르 형제가 만든 영화중에서도 가장 인상 깊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는 그저 항구에서 나룻배를 탄 채로, 파도를 헤치고 나아가는 세 명의 남자를 보여주는 것이 전부이다. 이 영화가 놀라운 것은 영화에 가득 찬 활력적인 분위기이다. 여기서 뤼미에르 형제의 천재성이 드러난다. 그들은 영화사상 최초의 세트를 지어 배우들에게 연기를 ‘지시’한 토마스 에디슨과 그의 조수들과는 달리, 혹은 뤼미에르 형제의 영화를 보고 최초의 극영화를 만들어냈다고 알려진 조르주 멜리에스와는 달리 어떠한 미적, 예술적 의도 없이 ‘적당한’ 위치에 카메라를 위치시킨다. <항구를 떠나는 배>에서 그 위치는 너무도 절묘한데, 프레임의 좌측에는 방파제에서 네 명의 여인이 수직적인 구도로 서 있고, 세 명의 남자가 탄 배는 프레임의 중앙에서부터 오른쪽으로 이동하며 프레임의 수평을 가로지르며 점점 롱 샷으로 멀어지면서 화면에 완벽한 조형미를 형성한다. 거친 파도가 화면의 정면을 향해 다가오고, 일정한 속도로 노를 젓는 남자들의 모습으로 확인할 수 있는 반복적인 몸짓에는 약간의 희극적인 모습마저 느껴진다. 점점 더 먼 바다로 배가 나가자 파도는 더 거세지고, 배에서 노 젓는 사람을 지휘하던 한 남자는 거센 파도에 휘청거리면서 영화는 끝난다. 그렇게 갑작스럽게 영화가 끝나고 나면, 자연스레 이들의 운명이 자연 속에 속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아는 우리는 이 갑작스러운 영화의 중단에 약간의 서스펜스마저 느낄 수 있다. 영화는 자연이 만들어내는 파도의 불규칙적인 리듬과 그 불규칙적인 리듬에 맞춰 노를 젓는 남자들의 규칙적인 몸짓, 그리고 그 몸짓에 따라 움직이는 배의 비일관적인 흐름으로 인해 영화 전체가 살아 있다는 느낌마저 불러일으킨다.

흥미로운 점은 이 모든 것이 뤼미에르 형제가 의도적으로 연출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심지어 갑작스럽게 끝나고 마는 그 엔딩마저도 당시 필름의 한계 때문에 발생된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우리가 흔히 장르적으로 정의 내리는 다큐멘터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수잔 헤이워드는 「영화 사전」에서 다큐멘터리를 정의 하면서 ‘허구가 아닌 현실을 직접적으로 다루면서 현실의 허구적인 해석 대신 현실 그대로를 전달하는 영화’라고 했다. 뤼미에르 형제는 현실을 직접적으로 다루면서 현실을 그대로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항구를 떠나는 배>는 사전적 의미의 다큐멘터리라는 장르적 정의보다 한층 더 복잡한 영화다. 정확히 말하자면 <항구를 떠나는 배>는 다큐멘터리 영화(movie)가 아니라 활동사진(motion picture)이라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뤼미에르 형제가 <항구를 떠나는 배>에서 한 일은 적당한 위치에 카메라를 가져다 놓고 그것을 사진 찍듯이 촬영한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만약에 뤼미에르 형제가 영화를 발명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항구를 떠나는 배의 모습을 사진으로 촬영하였을 것이다. 그들은 사진을 촬영하듯이 영화를 촬영했을 뿐이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게 촬영했기 때문에 뤼미에르 형제는 에디슨이나 멜리에스를 포함한 수많은 초창기 영화감독들이 그랬던 것처럼 영화를 연극적으로 촬영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뤼미에르 형제는 영화가 예술이 아니라 그저 하나의 발명품이라고만 생각하였고, 또한 그들 본인이 영화감독이 되기 이전에 사진가였기 때문에 그들은 프레임 안에 있는 미장센에 더 이상 극적인 개입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은 뤼미에르 형제가 영화 사업을 중단하게 되는 이유가 되었지만, 역설적으로 영화의 가능성을 열어준 일이기도 했다. 그 가능성이란, 감독이 별다른 사건이나 이야기를 만들지 않고 자연의 상태를 촬영하는 것만으로도 한 편의 영화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인 것이다.

우리가 지금 극장에서 만날 수 있는 대다수의 영화에는 너무나도 많은 것들이 한 화면 안에서 이루어진다. 카메라는 끊임없이 움직이고 편집은 숏을 충분히 감상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지나가며, 미장센은 과포화 상태가 되어 화면은 그 감당할 수 없는 이미지에 폭발하려고 하며, 그 사이에 일어나는 공백마저도 수많은 음악과 사운드들이 휘황찬란하게 빈틈을 메워버린다. 그런 상황에서 관객이 이미지에 대한 사고력이 떨어지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그렇게 이미지에 대한 사고력이 수많은 현란함 속에 파묻히게 되면 관객은 이미지를 버리고 이야기를 쫓아가는 것으로 만족하며 극장을 나오게 된다. 더 이상 대중 영화에서 존 포드가 모뉴먼트 벨리의 그 거대함을 무심하게 쳐다보게 했던 것과 같은, 혹은 오즈 야스지로가 다다미 방에서 일어나는 부녀간의 대화를 그들의 눈높이에서 냉정하게 지켜봤던 것과 같은, 혹은 로버트 J. 플래허티가 얼음 구멍에서 표범 낚시를 하는 이누이트족의 그 절대적인 시간을 관찰했던 것과 같은 사려 깊은 이미지들은 사라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뤼미에르 형제가 태초의 영화시기에 만들어낸 <항구를 떠나는 배>는 더욱 중요해진다. 뤼미에르 형제는 그저 적당한 위치에서 영화에 나오는 이미지를 촬영하기만 했지만, 그 그저 적당한 위치에서 촬영했다는 단순한 사실이. 그 단순함 안에 완벽한 조형성을 갖춘 채로, 희극성과 서스펜스가 동시에 들어있을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해냈다는 사실이 나를 감동하게 만든다. 다큐멘터리의 동사형인 다큐먼트(document)는 ‘가르치다’를 의미하는 라틴어 도세르(docere)로부터 파생된 단어라고 한다. 또한, 다큐멘터리라는 단어가 영화의 장르로 정의되기 이전인 1800년대에는 가르침, 설득, 경고의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뤼미에르 형제의 <항구를 떠나는 배>는 우리에게 영화의 근본적 의미를 알려주는 도세르이며, 현대 영화에 가르침과 경고를 주는 다큐멘터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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