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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이스]병구

형슬우, 2015

[초이스]병구 대표 이미지

2015년 서울독립영화제의 심사를 맡았다. 장편과 단편 극영화부터 다큐멘터리, 애니메이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영화를 봤다. 총 48편이었다. 좋은 작품들과 좋지 않은 작품들이 있었다. 중간은 별로 없었다. 전체적인 심사회의는 비교적 어렵지 않게 끝이 났다. 몇 편을 두고 논쟁이 벌어지기는 했다. 하지만 ‘좋은 작품’ 들은 명확했다. 시상식을 겸한 폐막식까지의 과정은 순조로웠다. 수상작들은 많은 박수를 받았다. 잔치는 성황이었고, 영화제는 성공적으로 막을 내렸다. 그런데, 끝내 마음속에서 맴도는 작품 하나가 있었다. 수상작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다른 작품과 치열하게 경합을 벌이다가 아깝게 수상을 하지 못한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심사회의 때 본격적인 언급도 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이 작품이 좋았다.

제목은 <병구>. 형슬우 감독. 서현우, 김이정 주연. 러닝타임 22분.

봄날의 오후. 대학가에 흔히 있을 법한 원룸이 배경이다. 주인공 민지는 가구 배치를 바꾸고 싶다. 힘 좀 써줄 남자가 필요하다. 남친은 없다. 여기저기 전화를 돌리는데 받는 남자마다 까칠하고 비협조적이다. 아무리 남자가 없어도 얘만큼은 부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하는 수 없다. 대학 동창, ‘병구’에게 전화를 건다. 두둥. ‘병구’ 등장. 일단 첫인상부터 덮어놓고 비호감이다. 면도 안 한 까칠한 생김새에 호섭이 머리. 기름때처럼 느끼하게 깔리는 목소리로 구사하는 농담은 하나같이 하찮은데 그걸 또 쉬지를 않는다. 등장부터 영화를 마구 헤집어 놓는 이 청년, 다짜고짜 배는 또 고프다며 집안도 멋대로 뒤져댄다. 가구 옮기는 본업(?)엔 관심도 없는 거다. 병구는 눈치가 없고, 무례하고, 한심하고, 지저분하고, 불쾌하다. 민지가 불쌍하다. 병구의 등장부터 강렬하게 발생하는 코미디는 상황 코미디를 지나 점차 캐릭터 코미디로서의 면모를 갖춘다. 그렇게 차박차박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마침내. 뜻밖에도 우리는 멜로적인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병구 녀석은 진심이었다. 순정이 있었다. 민지는 병구를 새롭게 본다. 가랑비에 젖어들어 가듯 어느새 캐릭터에 흠뻑 이입돼버린 우리는 허헛, 참. 멋쩍게도 가슴 한켠, 설레고야 만다.

이야기의 발상부터 완결까지가 흠 없이 유기적이다. 특히 대사들이 좋다. 그걸 또 배우들이 맛깔나게 잘 살려낸다. 두 배우의 호흡은 수준급이다. 맛난 대사들을 신나는 리듬으로 주고받아가며 코미디 호흡을 효과적으로 만들어낸다. 특히 병구 역할을 맡은 서현우의 연기는 깨알 같은 디테일들이 잘 살아있다. 계산에 의한 연기라기보다 숨 쉬듯 편안하게 노는. 보통의 내공은 아니다. 촬영은 안정적이고, 편집도 깔끔하다. 전반적으로 영화 어디에도 이격감이 없다. 맞다, 좋은 완성도다. 그러나, 그렇다. 이렇게 일일이 나열할 만큼 장점들을 명확히 기억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영화를 수상작 후보권에 적극 밀어 넣지 않았다.

영화제 수상작이라면 으레 요구되는 작품의 성향 또는 태도 같은 게 있기 마련이다. 상의 권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그건 종종 완성도와 다른 개념이다. 게다가 서울독립영화제 같은 성격의 영화제라면 더더욱 그렇다. ‘병구’에 도발적인 주제는 없다. 파격적인 화법도 없다. 감독의 야망이 뜨겁게 돋보이는 쪽도 아니다. 매끈하고 안정적인, 상업적 화법은 역설적으로 상대 평가를 후하지 못하게 만든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오히려 완성도를 깨더라도 어긋나 튀어나온 구석이 있었다면, 좀 다른 해석과 대접을 받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재능있는 젊은 감독은, 이 젊은 배우는, 서울독립영화제의 수상결과 따위와는 무관하게 제 갈 길 뚜렷이 직진할 재목들이라 믿는다. 이미 이 작품 하나로도 성큼 나아갔다. 만듦새를 보니 방향 제대로 잡고 계시다. 지체없이 그냥 가시면 될 듯.

영화제 폐막식 뒤풀이. 화장실에서 형슬우 감독, 서현우 배우와 인사를 나눴다. 영화 잘 봤다고 말을 건넸다. 그러나 상도 안 준 심사위원이 술 취한 목소리로 영화 잘 봤다고 말하는 게 어떻게 들렸을지를 잘 안다. 허나, 잘 봤으므로 잘 봤다는 거였다. 나는 당신들의 영화를, 이만큼 좋아했다. 그래서 여기, 특별히 언급하고 기록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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