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
[초이스]눈의 여왕
레브 아타마노브, 1957
러시아산 3D CG 애니메이션 영화 <눈의 여왕>(2013) 을 보면서 1957년 구소련 때에 발표된 셀 애니메이션 영화 <눈의 여왕>이 떠올랐다. 러시아 애니메이션의 선구자 레프 아타마노프가 감독한 이 <눈의 여왕>은 국내에는 제대로 소개된 적이 거의 없지만, 세계적으로는 이미 작품성 면에서 높이 평가받은 지 오래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눈의 여왕>은 너무나 유명한 안데르센의 동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글로만 된 이야기를 그림으로 시각화하는 과정에서 더 확실한 세계관을 갖게 되었다. 비록 제작사인 소유즈물트가 디즈니 사의 대중성을 좇았다고는 하나, 미국보다 문화적 깊이가 더 깊은 러시아 사람들의 본성은 짧은 인기가 아닌 후대에 길이 남을 걸작을 남겼다. 사실적이지만 실사와는 같지 않은 우아한 움직임, 부드럽고 기품 있게 묘사된 캐릭터들, 자극적이지 않으면서 풍부한 러시아적인 색감 등 디지털 제작기술이 발달한 요즘에도 구현하기 힘든 이 작품만의 미(美)는 여전히 연구대상이다.
무엇보다 눈의 여왕에게 납치된 남자친구 카이를 구하기 위해 굳건한 의지로 험한 여행을 스스로 택하는 소녀 겔다의 모습은 21세기의 여성상을 앞서 보여주는 듯하다. 실제로 겔다는 세계 애니메이션 역사에서 헤로인의 모습을 확 바꿔버린 캐릭터로 평가받는다. 이전까지는 애니메이션 속에는 디즈니로 대변되는 남성의존의 공주형 헤로인이 전부였는데, 남자를 구하는 여린 여자의 등장으로 새로운 주인공 상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이는 디즈니의 주도하에 놓인 세계 애니메이션 판도에 균열을 일으키며 또 다른 세력의 등장으로 예고했다. 여성주도의 작품관을 펼쳐 보이는 다카하타 이사오, 미야자키 하야오 등의 일본의 작가주의자들이다.
도에이동화의 노동조합에서 처음 <눈의 여왕>을 접한 다카하타와 미야자키는 몇 년이 지난 뒤 <태양의 왕자 홀스의 대모험>(1968)을 제작해 상업성만을 추구한 당시 일본 애니메이션 시장에 ‘생각하는 작품’을 선보인다. 흥행은 안됐지만, 이 작품을 기점으로 일본 애니메이션은 지브리의 흥행역사로 이어지는 전혀 새로운 궤도를 그어 나갔다. 인물의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일본 최초 캐릭터로 회자되는 헤로인 힐다는 겔다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겔다를 보고 눈의 동공까지 그리게 됐다는 미야자키의 말은 겔다의 표현력에 크게 영향받았음을 일러준다. 현재 일본의 많은 평론가들은 프랑스 감독 폴 그리모의 <왕과 새>(1980)와 <눈의 여왕>이 없었다면, 오늘날 세계에서 인정받는 일본 애니메이션의 영광은 없었다고 단언한다.
스탈린이 죽은 뒤에 발표된 <눈의 여왕>은 구소련의 해빙기와 연관된 작품으로 자주 풀이된다. 추운 겨울을 극복하고 따사로운 봄을 맞이하듯, 눈의 여왕에게서 사랑하는 카이를 구해내 행복한 일상으로 데려오듯, <눈의 여왕>은 상업성이란 무미건조한 껍데기에 싸여있던 애니메이션 속에 작품성이란 훈훈한 혁명을 불어넣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