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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이스]HER

김고은, 2015

[초이스]HER 대표 이미지

지난 1년 동안, 개인적으로 가장 열심히 지지하고 옹호한 국내 단편 애니메이션은 김고은 감독의 < Her >이다. < Her >를 주목한 출발점은 이 작품의 주인공이 (적어도 한국 애니메이션에서는) 이전까지와는 다른 유형의 인물이기 때문이다. 여인은 외롭다. 그리고 연인을 원한다. 사내의 사랑을 통해 자신을 확인하지만, 그가 자신에게 집중하지 않자 상처를 받는다. 그리고는 다시 그리워한다. 뻔하다고? 

뻔한 사랑, 뻔한 집착, 뻔한 그리움을 진부하지 않게 하는 건 그녀의 행동과 표정과 침묵의 말투, 그리고 그 저변에 깔린 정서이다. 무표정하다. 말이 없다. 일말의 탄식이나 신음도 없다. 과잉이 아니라 극도의 절제된 이미지 속에서 움직인다. 그녀의 몸가짐은 마치 살진 암고양이의 걸음걸이처럼 우아하게 관능적이다. 사랑을 갈구할 때는 한없이 여린 것 같지만, 배신당했을 때는 거침없다. 사내의 거죽(!)을 세탁기 속에 돌리고는 다리미로 밀어버린다. 그러나 잔혹하지 않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은유이기 때문이다 (하물며 분노의 다림질이 아니라, 지극 정성이 담긴 다림질이다). 여인의 표정은 사내와의 관계 속에서 부여된다. 키스로 붉은 입술이 묻어나고, 붉은 피로 눈동자가 찍힌다.

이러한 설정은 팜므 파탈이나 욕망이라는 뻔한 비평용어를 불러들일 수 있다. 하지만 < Her >는 욕망이 아니라 욕정에 대한 작품이다. 사회문화적 권력이 작동하는 욕망이 아니라, 생명체가 지닌 원초적인 욕정이 이 작품의 핵심이다. 욕망은 문화 권력적 코드를 통해 작동하면서 허위적인 만족과 충족으로 나가지만, 욕정은 찰나적 절정과 영원한 갈망을 무한 반복한다. 욕망은 관념 속에서 운동하지만, 욕정은 육체 속에서 꿈틀댄다. < Her >의 그녀는 욕정 덩어리이다. 상대남도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굳이 팜므 파탈이라는 성적 구분을 집어넣는 건 난센스다.

욕정을 전면에 내세움에도 불구하고 < Her >는 외설스럽지 않다. 강렬한 색상 설정, 육감적인 곡선, 관능적인 움직임은 우아하기 그지없다. ‘쎈 언니’처럼 보이지만 욕을 달고 살거나 난폭하게 폭주하지 않는다. 쎈 척하기 위해 상스럽거나 천박하지 않다 (올해는 한국 단편 애니메이션도 욕배틀을 전면에 내세우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자기애라는 미명 아래, 관념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지도 않는다 (이제껏 자기 학대에 가까운 자기 연민을 내세운 작품이 얼마나 많았던가). 이미지는 종종 예기치 않게 대담히 표현되지만, 이야기의 흐름은 태연하다. 서두르지도 망설이지도 않고, 그저 묵묵하게 그리고 묵직하게 펼쳐진다.

강렬하면서도 정제된 욕정, 농염하지만 우아한 관능, < Her >가 선보이는 미덕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욕정에 대해 다루는 태도, 욕정에 대해 갖는 정서가 이 작품의 차이를 만들어 낸다. 뜨거운 기운을 차갑게 다루는 방식에서 < Her >는 그 진가를 드러낸다. 옳고 그름의 가치에서 벗어나고, 낭만적 휴머니즘 따위는 가볍게 던져버린다. 어차피 욕정은 영구히 충족될 수 없다. 그렇다고 초탈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그 순간을 맞이하고, 그 순간만큼은 자신을 내던져야 하고, 언제가 될지 모를 그다음의 순간을 기다리는 것뿐이다. 

HER

빨랫줄에 걸려 축 늘어진 사내의 껍데기를 바라보며, 여인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불완전한 충족이 한없이 되풀이될 것이라는 점, 결코 사내가 (사랑을 통해)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점, 그럼에도 자신은 상대의 죄 (혹은 여인의 몫까지 짊어진 대리자의 고난)를 씻어내야 한다는 점 (어쩌면 세탁 통의 회전/순환은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가 벗어날 수 없는 욕정의 굴레이기도 하다) 등등. 이토록 복잡미묘한 심정을 담고 있는 여인의 표정은 여전히 무표정하다. 이 표정과 태도와 심리와 정서는 이제껏 한국 애니메이션이 요구한 관객의 정서적 연령대에 도전한다. 순수함이라는 서정성이 아니라 살아본 만큼의 성숙함을 관객에게서 불러내려 한다. 그리고 이 작품을 판단하고, 평가하고, 선정하고, 선별하고, 선택하거나 배제하려는 자 (이 리뷰를 쓰는 나 자신을 포함한 평가자들)가 지닌 비평의 용어와 평가의 어휘에 대해서도 도전한다. 우리는 < Her >, 그녀를 제대로 품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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