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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이스]작별

황윤, 2001

[초이스]작별 대표 이미지

무엇이 동물을 위한 최선의 선택일까. 인간에게는 그에 대한 질문, 그에 대한 대답을 할 자격은 없으나, 그래야 할 책임은 있다. 의지와 무관하게 인간 사회로 불려와, 인간의 언어와 논리와 기준으로 설명되고 인간의 감정과 연민으로 이해되는 동물들. 하지만 아무리 정치적으로 올바른 시선으로 그들에게 접근해도, 인간은 동물들과 완전한 공감을 이루지 못하며, 그들과의 거리를 좁힐 수 없다. 동물은, 인간에게 영원한 타자다. 그럼에도 인간이라는 원죄를 짊어지고서, 그들과 최선의 윤리적인 관계를 맺어야 하고, 그들 입장에 서 보아야 한다는, ‘인간다운’ 인간이 되기 위한 화두 앞에서 우리는 늘 궁지에 처한다. 혹은 가장 비천하고 궁핍한 삶을 견디는 인간 계층을 떠올리며 그 고민의 수위에 대해 고민 한다. 얼마 전, 서울대공원의 돌고래 쇼에서 활약하던 남방 큰 돌고래, ‘제돌이’를 바다로 방사하는 결정이 내려진 뒤, 그 결정을 둘러싸고 동물보호연대, 정치인들, 조련사들 간에 벌어진 논쟁이나 지난 몇 년간, 동물들을 아사상태로 방치하다 적발되어 매스컴을 떠들썩하게 했던 강원도 어느 동물원의 실태에 대한 반응들을 상기해보라.
동물원에서 자원봉사를 하는 사람들과 조련사들, 그리고 야생동물을 구조하러 다니는 수의사의 일상을 따라가며, 실은 그들이 보살피거나 구조하는 동물들을 응시하는 황윤의 <작별>은 제작된 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해결될 수 없는, 진행 중인 화두이다. 동물을 사랑한다고 믿으며 동물과 함께 사는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을 관찰하고, 그런 사람들의 애정에도 불구하고 병들어 신음하며 죽어가는 동물들의 몸과 철창 안에서 아무런 희망 없이 카메라를 물끄러미 쳐다보는 동물들의 시선을 무기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을 때, 영화는 이미 노골적인 폭로나 고발 이상의 슬픔과 괴로움을 우리에게 안긴다. 인상적인 것은 맹수들에게 손을 뻗어 고기를 던져주고 서슴없이 그들을 만지는, 누가 보아도 동물을 사랑하는 것이 분명한 자원봉사자들이 동물원에 대해 가지는 생각이다. “야생에서 멸종되는 동물들을 보호하고 교미도 시키며 사라지는 것을 막을 수 있다”거나 새끼 호랑이에게 목줄을 달면서 “이렇게 훈련을 시키면 습관이 들어서 오히려 동물원의 작은 공간에서 지내는 데 스트레스를 덜 받고, 더 오래 산다”는 이들의 논리는 이 영화에서 (개인적으로는) 가장 끔찍하고 난처한 것이다. 서울대공원의 ‘제돌이’ 방사가 결정되고 나서, 제돌이 담당 조련사가 과연 방사가 해답인지 모르겠다고 울먹이던 순간이 떠오른다. 동등하고 독립적인 개체로 인정하는 일과 ‘인간적으로’ 사랑하고 보호하는 일은 얼마나 이율배반 적인가. 어디서부터 어떻게 되돌려야 이 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가. 

강아지보다 얌전한 새끼 호랑이, 사방이 온통 시멘트로 뒤덮인 비좁은 방에서 햇빛 가운데로 나가길 거부하는 맹수, 늘어진 몸과 텅 빈 눈빛으로 창밖을 보는 원숭이, 괴성 한번 내지 못하고 몸부림으로 고통 하는 맹수와 마치 자신의 미래를 예견하듯 그저 그 모습을 지켜보는 또 다른 맹수, 그들 사이를 가로막는 철창, 인간은 도저히 알 길이 없는 그들이 서로에게 보내는 시선... 그곳은 이미 죽은, 혹은 죽어가는 공간이다. 동물원이라는 인간의 환상, 쾌락은 결국 그 죽음을 소비하는 결과다. <작별> 속, 철창 안에서 동물들이 깊은 체념과 무력감으로 던지는 항의의 응시는 우리에게 묻는다. 동물들의 삶은 인간의 삶과 비교 안에서가 아니라, 이미 그 자체로 존엄할 권리가 있지 않은가. 그 어떤 생명도 상대적인 가치가 아니라, 절대적인 가치 안에서 이미 절실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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