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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이스]벌거숭이

박상훈, 2012

[초이스]벌거숭이 대표 이미지

아내가 어린 아들을 씻기고 있고, 남편은 그 옆 싱크대에서 오줌을 눈다. 아내가 뭐하는 짓이냐며, 남편을 타박해도 그는 태연하다. 오줌을 다 누고 다시 방으로 들어간 남편은, 방금 씻고 온 아들을 꼭 껴안고 누운 채 TV를 본다. 어찌 보면 조금은 엉뚱하고 정겨워 보이기까지 한 일상의 풍경일 수도 있지만, 나는 영화의 이 장면이 왠지 불길하게 느껴졌다. 

남편의 이름은 박일래고, 아내의 이름은 한유림이다. 부부는 어느 지방 변두리, 존재감 없는 작은 구멍가게를 꾸리며 살고 있다. 생계는 빠듯한데 돈 나올 구멍은 보이지 않고, 어렵게 찾아간 친정에서는 문전박대다. 부부는 친할아버지에게 아이를 맡기려고도 해봤지만 이조차 쉽지 않다. 게다가 어린 아들은 게임에 빠져 있다. 하루 종일 PC방에서 시간을 보내는 아들을 데리러 온 한유림이 체념조로 “재밌냐”고 묻자, 아들은 아무 대꾸 없이 앉아 있다. 모니터를 향해 욕을 뱉는다. “씨발.”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아이의 욕을 들으며, 불길한 기운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그리고 얼마 뒤, 기어코 사건이 터진다. 

가게를 판 돈으로 택배 트럭을 사려던 박일래가 사기를 당해 돈을 통째로 잃고 돌아온 저녁. 그는 밥상 위에 농약을 올려놓으며 아내에게 말한다. “가자.” 박일래는 아내와 아들을 죽인 뒤 자신의 목숨도 끊으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다음날 홀로 깨어난다. 힘들게 살아가는 어느 가족의 이야기처럼 진행되던 영화는, 곧이어 흘러나오는 김두수의 읊조리는 노랫소리와 함께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날아 오른다’. 땅에 발을 붙이고 있는 것 같던 ‘가족의 이야기’가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는 ‘영적인 이야기’로 탈바꿈해 비상한다.

영화의 후반부는 홀로 된 박일래의 여정을 그리고 있다. 시간이 흘렀는지 박일래는 긴 머리의 부랑자가 되어 여기저기를 떠돈다. 그 여정 속에서 그는 자꾸만 자신의 죄의식과 마주친다. 꾸역꾸역 살아가기 위해 흘러든 농촌 마을에서 마주친 농약병. 지쳐 잠이 든 폐가에서 만났을 죽은 아내와 아들의 유령들. 손자와 며느리를 죽인 박일래를 찾아온 그의 아버지가 극약을 컵에 따르며 내뱉는 “가자.”라는 한 마디. 자신이 가족을 향해 내뱉었던 “가자” 라는 말을 아버지에게 들은 박일래는 죽기를 거부한다. 그런 자신에게 칼을 쑤셔 넣는 아버지를 뒤로 한 채, 박일래는 또다시 달아난다. 그러나 그 종착역은 죽음이다. 스스로의 죽음. 박일래는 자살을 시도하지만, 그조차 실패로 끝나고 만다. 그는 그렇게 삶과 죽음의 경계를 끊임없이 방황하지만, 그 어느 곳에도 안착하지 못한다.

살아도 살지 못하고,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영겁의 삶. 영화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박일래의 여정을 통해 고통의 굴레 속에 놓인 인간 존재를 그리고 있다. (‘존재’라는 단어만큼 막연하고 뭉뚱그려진 말은 없겠지만) 황량한 갯벌 위에서 펼쳐지는 마지막 장면은 그야말로 인간의 ‘존재’라는 것에 대해 온몸으로 절절히 느껴지도록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 고통스럽게 슬프고, 고통스럽게 아픈 터널의 끝, 모든 것을 초월한 듯한 박일래의 마지막 절규는 외롭고 연약한 존재의 서러운 울음으로 들린다. 그 울음 섞인 절규를 비집고 들어오는 김두수의 읊조림. “이제 안녕을 고하라. 바람이 저녁강을 스친다...” 김두수의 노래 ‘저녁강’이 박일래의 오열과 겹쳐지는 마지막 장면은 그 어떤 영화의 엔딩보다 더 큰 울림을 만들어낸다.

<벌거숭이>를 통해 배어 나오는, 무어라 규정지을 수 없는 암울함과 슬픈 느낌의 기원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그것은 그 어떤 현실적 배경이나 이유로도 단정 지을 수 없는, 인간 존재의 태생적인 비극.. 비애.. 하지만, 난 아직 이 정도밖에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설명하기 어려운. 이 어지러운 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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