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
[초이스]기억의 잔상
타마라 스테파니안, 2012
<기억의 잔상>의 원제는 'Embers'이다. 장작 등이 불에 타고 사그라질 때 남는 마지막 붉은 기운을 일컫는다. <기억의 잔상>에서 타마라 스테파니안 감독은 구 소련연방 시대를 살았던 할머니 세대가 지닌, 이젠 희미해져가는 그 마지막 기억을 담고 있다.
<기억의 잔상>의 시작은 할머니에 대한 기억에서 시작한다. 할머니의 이름을 물려받고 할머니와 남다른 애정을 나눴던 감독은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정작 할머니에 대해, 할머니가 살아온 삶에 대해 무지했음을 깨닫게 된다. 할머니가 살았던 삶을 되짚기 위해 손녀 타마라는 할머니와 청춘을 함께 보내고 평생을 친구로 지냈던 대학 시절 친구들을 찾아가 인터뷰를 시작한다. 다정하고 쾌활한 여성이었으며 동시에 열렬한 공산당원이기도 했던 할머니에 대한 기억의 조각이 모여지면서 영화는 할머니를 넘어서 할머니가 살았던 세대의 꿈과 열정을 기록하는 기회로 변모해 간다.
아르메니아는 굴곡진 역사를 지니고 있다. 19세기말부터 시작된 터키의 탄압은 세계 제1차대전 기간 중 60만명에 이르는 대학살로 이어지면서 많은 수의 아르메니아 인은 망명의 길을 선택했다. 아르메니아는 1920년대 소련연방에 편입되었고, 소련연방이 해체되면서 독립국가가 되었다. 감독의 할머니 타마라의 세대는 바로 소련연방에 편입된 이후 태어나 성장하고, 연방의 해체과정과 아르메니아의 변화과정을 직접 겪은 세대이다. 이들 세대는 소련연방이 약속했던 평등과 희망을 기억하는 세대이며, 자치국가로 독립한 이후 밀려드는 자본주의에 의해 급격하게 변화해가는 사회와 전통이 사라져가는 것을 목격한 세대이다.
<기억의 잔상>은 할머니 세대의 모습을 오래된 물건들과 기억으로 채워진 그들의 공간과 그들의 깊은 주름에 새겨진 눈물과 웃음의 기억을 아름다운 색감과 정교한 프레임으로 잡아낸다. 다큐멘터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인터뷰 장면들은 마치 한 폭의 오래된 초상화처럼 고풍스러움과 따뜻함 그리고 화려한 색감으로 이루어져있다. 그들이 풀어내는 기억의 언어만큼이나 침묵을 주시하는 과정에서 타마라 스테파니안 감독이 이들 세대에 갖고 있는 연민과 애정이 배어나온다.
<기억의 잔상>은 내용의 대부분이 인터뷰로 이루어진 다큐를 어떻게 영화적인 미학으로 풀어가는가 그리고 ‘할머니에 대한 기억’이라는 개인적인 기록을 어떻게 그 세대에 대한 사회적 역사적 다큐로 확장시킬 수 있을 것인가 질문하며 스스로 그 해답을 찾아가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기억의 잔상>은 부산국제영화제의 다큐멘터리 펀드인 AND(아시아다큐멘터리네트워크: Asian Network of Documentary)의 지원을 받았고 2012년 최우수 아시아다큐멘터리 상인 비프메세나상을 수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