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
[초이스]중2병이라도 사랑을 하고 싶어!
이시하라 타츠야, 2013
애니메이션 초이스 코너를 통해 필자는 쭉 한국애니메이션을 다뤄왔다. 아무래도 한국의 애니메이션 데이터베이스 사이트니까 한국작품을 주로 다루고 싶다는 생각이 컸다. 하지만 지난 번 <천공의 성 라퓨타>에 이어 이번에도 또 일본작품에 대해 쓰게 되었다. <천공의 성 라퓨타>는 1986년 작품이었지만 이번에는 최신 작품에 관해 쓰려고 한다.
필자가 처음 애니메이션 관련해서 잡지나 여러 매체에 글을 쓰기 시작했던 1990년대에는 TV와 극장 이외에 애니메이션을 볼 수 있는 방법이 별로 없었다. 그러다보니 국내에 수입되지 않은 해외 작품을 소개할 때에는 줄거리 소개와 도판을 통한 애니메이션 그림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했다. 하지만 지금은 시대가 달라졌다. 케이블과 위성방송에는 ‘한일 동시 방영’을 내세우는 애니메이션 전문 채널까지 생겼을 정도다. 과거에는 영화제가 아니면 볼 기회가 거의 없었던 단편애니메이션 분야조차 포털 사이트에서 다운로드 판매되고 있고, 유튜브 등 동영상 사이트에 직접 자신의 작품을 올리는 애니메이션 작가도 존재한다. 그러다보니 국내에 수입되지 않은 작품이라도 인터넷을 통해 실시간으로 작품 소개를 찾아볼 수 있고, 심지어는 작품이 제작되기 전부터도 제작 발표 뉴스가 국내에 바로바로 소개되는 상황인 것이다.
원래 필자 역시도 그런 마니아의 한 사람이었다. 필자가 PC통신 하이텔의 애니메이션 동호회에 <신세기 에반겔리온>을 1995년 8월 12일에 신작 정보로서 소개한 적이 있는데, <에반겔리온>이 일본에서 방영 개시된 날짜가 10월 4일이었으니 방영 2개월 전에 이미 글을 썼던 것이다. 극장판의 경우에는 더욱 빨라져서 <사도신생 DEATH AND REBIRTH>의 일본 개봉일은 1997년 3월 15일이었는데, 필자가 대략의 내용과 일본 잡지에 소개된 내용을 설명하는 글을 게시판에 올린 것은 3월 28일이었다. 완결편인 < THE END OF EVANGELION Air/진심을, 그대에게 >는 개봉일인 1997년 7월 19일의 단 이틀 후인 21일에 일본 관객들의 반응을 국내 PC통신 게시판에 소개했다. 그 당시는 아직 인터넷이 본격화되기 전이었지만 필자는 일본의 PC통신망에 직접 가입해서 활동하고 있었기에 일본 내의 반응을 빠르게 국내에 소개할 수 있었던 것이다. 2000년대 이후 인터넷이 일반화되면서 필자와 같은 역할을 누구나 할 수 있게 됨으로 하여 이제는 ‘정보의 실시간성’이 더 이상 특별하지 못한 상황이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단순히 줄거리나 캐릭터 소개에 국한되는 작품 리뷰의 의미는 많이 축소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따라서 지금 이 글에서 <중2병이라도 사랑이 하고 싶어!>라는 작품의 줄거리나 캐릭터를 상세히 나열할 생각은 없다. 당장 케이블이나 IPTV에서 방송되고 있으니 직접 볼 수도 있고, 인터넷에서 찾고 싶다면 한글 위키피디아에 상세하게 나와 있다. 무료로 인터넷에서 찾아볼 수 있는 내용을 이 사이트에 옮겨놓기보다는, 좀 다른 글을 써보려고 하는 것이다.
■애니메이션 제작사 교토애니메이션
<중2병이라도 사랑이 하고 싶어!>는 <케이온!>으로 2000년대 중반 이후 일본애니메이션계에서 큰 인기를 누린 애니메이션 제작사 교토애니메이션의 작품이다. 교토애니메이션은 1981년에 창업되었으니 벌써 30년 이상 애니메이션 업계에서 활약해온 고참 프로덕션인데, 주로 하청작업에 몰두하다가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부터 자체 제작을 시작하게 된 회사이다. 2006년 제작한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이 일본 내에서의 높은 인기는 물론이고 유튜브 등을 통해 세계적으로 화제를 모았고(마치 2012년 싸이가 그랬던 것처럼 오프닝 애니메이션의 댄스가 화제가 되었다), 후속 작품이 연속적으로 히트하면서 2000년대 일본을 대표하는 애니메이션 제작사의 하나가 되었다.
일본애니메이션에는 몇 가지 기본적인 구분 방법이 있는데, 발표 매체에 의한 구분(TV애니메이션, 극장용 애니메이션, 그리고 처음부터 비디오 매체로 제작되는 애니메이션)이 그것이고 또 한 가지로는 원작물과 오리지널 애니메이션이란 분류가 있다. 일본애니메이션은 그 태반이 만화나 소설 등을 ‘원작’으로 삼아 애니메이션화(化)시킨 작품의 비중이 높다. 예산이 많이 들어가는 애니메이션 제작의 특성상, 처음부터 오리지널 스토리 작품을 만드는 것은 일본에서도 쉽지 않은 것이다. 일부 대형 제작사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경우에는 기존 원작이 있는 작품을 애니메이션화하는 경우가 많다. 만화, 소설 등 기존에 히트한 작품을 소재로 하여 애니메이션을 만들게 되면 굳이 홍보하지 않고도 원작의 팬들을 애니메이션으로 끌어들일 수도 있고 화제성이 있기 때문에 애니메이션 회사는 원작물을 선호하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애니메이션 회사는 항상 좋은 원작을 찾게 된다. 인기있는 만화잡지와는 아예 장기간 좋은 관계를 맺기도 한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관계를 맺는다고 해도 전속관계도 아닌 이상 특정 잡지나 특정 작가의 작품을 계속해서 받을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일본의 출판사는 거대 자본의 대기업이다보니 직접 출판사에서 애니메이션 회사에 하청을 주어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는 경우도 있다. 그밖에도 모든 것이 원작사에 맞춰져 있다 보니 애니메이션 회사로서는 자사의 이익을 위해 오리지널 작품을 만들고 싶을 수밖에 없으나, 전술한 바대로 오리지널 애니메이션 작품을 제작하는 데에는 큰 리스크가 존재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애니메이션 업체가 선택한 방법 중 하나가 직접 원작을 만든다는 것이다. <중2병이라도 사랑이 하고 싶어!>는 바로 교토애니메이션에서 주최한 신인상 소설부문에 당선된 라이트노벨(일본의 학생층이 선호하는 소설)을 원작으로 만든 애니메이션이다. 원작물이긴 하지만 그 원작 자체를 애니메이션 회사에서 직접 출판함으로써 마치 오리지널 작품과도 같은 효과를 노린 것이다. 실제로 <중2병이라도 사랑이 하고 싶어!> 원작소설은 교토애니메이션이 직접 출판했다.
■‘중2병’이란?
작품에 등장하는 용어 ‘중2병’이란 무엇일까? 본래 중학교 2학년(만 14세 전후) 정도의 나이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자기애(自己愛), 자의식 과잉, 컴플렉스 등으로 인한 공상적인 행동이나 모습을 지칭하는 일본의 속어다. 원래는 일본의 개그맨 이쥬인 히카루가 1999년에 본인이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만들어낸 코너에서 나온 단어라고 하는데, 당초에는 단순히 중학교 2학년 때에 자주 보이는 행동에 관한 내용이었지만 유행어가 대개 그렇듯 많은 사람들에게 사용되면서 의미가 확장되었다. 지금은 자학적이거나 혹은 타인에 대한 야유로 사용되기도 하는 등 일본에서도 상당히 의미가 달라졌고, 한국에 수입되면서 국내 인터넷에서도 자주 볼 수 있는 단어가 되었다.
<중2병이라도 사랑이 하고 싶어!>는 그런 중2병이라는 용어를 차용해서, 일본에서 주로 볼 수 있는 중2병 현상의 극단적인 일면을 강조해서 표현한 캐릭터를 등장시키고 있다. 만화와 애니메이션이 발달되어 있는 일본의 학생들은 당연히 만화와 애니메이션에 친화성이 높다. 따라서 중2병의 발현 역시 만화/애니메이션적인 측면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에서도 판타지 애니메이션의 캐릭터와 같은 언동을 하는 것을 중2병의 전형적인 모습처럼 다루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앞서 언급했다시피 ‘중2병’이란 반드시 만화나 애니메이션과 관계된 것이 아니고 자의식 과잉으로 인하여 본인을 어떤 작품이나 스토리의 주인공처럼 생각하거나 주위의 모든 것을 어떤 설정 속에서 받아들이는 현상을 가리키는 용어다. “이 사회는 쓰레기다”, “어른들은 더럽다”는 식의 발언, 혹은 세상 모든 것을 음모론적으로 본다든지 남들은 모르는 비밀을 나만 안다거나 하는 과대망상 역시 중2병의 특징이다. 간단히 말하면 중2병은 바로 사춘기, 청소년기, 질풍노도의 시기에 다름 아닌 것이다.
그런 현상이 일본에서는 만화/애니메이션적 상상력으로 표현된다면, 국내에서는 예를 들어 “백신은 제약회사의 음모”라든지 “우리 민족은 사실 고대에는 엄청나게 국력이 강했다”는 소위 「환단고기」에 관련된 내용을 대표적인 중2병의 한국적 사례로 들 수 있을 것 같다. 매니아들의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중2병을 묘사하면서 종종 일본식 사례를 그대로 직역한 듯한 표현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은데, 정말 제대로 ‘한국적 중2병’을 묘사하려고 한다면 이와 같은 한국적 현실로 해석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또 일본에서는 ‘중2병을 부끄럽게 여기고 중2병적인 현상을 비웃는 행태’에 집착하는 것을 ‘고2병’, ‘대2병’이라는 식으로 다시 웃음의 대상으로 삼는 경우도 있다는 점도 알아두면 좋겠다. 본래 이런 용어들의 ‘발명’은 결국 객체화, 객관화를 통해 상대방과 나의 차이를 강조하기 위한 것이므로 중2병만이 아니라 정치나 사회 용어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수구, 진보, 좌파, 우파, 신자유주의, 혹은 난독증이니 파워블로거, 폐인, 오타쿠 등 상대방을 규정하기 위해 사용되는 용어들도 그 근본은 중2병이란 용어와 마찬가지인 것이다. 중2병이란 용어 역시 상대방을 비웃기 위해 사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중2병이라도 사랑이 하고 싶어!>란 작품에도 설명되어 있지만 중2병은 사춘기, 즉 모든 인간이 성장하면서 반드시 지나는 통과의례인 셈이므로 중2병을 비웃는다는 것은 자기자신도 비웃는 결과가 된다는 점에 유의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본인이 스스로 자학적인 의미에서 중2병을 비웃는 것은 하나의 개그로서 이해될 수 있겠지만, 남을 타자화하고 희화화하기 위해 중2병을 비웃는 것은 고2병이나 대2병이라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당하는 결과가 될 뿐이다. (중2병 이외의 다른 어떤 용어를 통해 타인을 규정하는 것도 전부 마찬가지다.)
<중2병이라도 사랑이 하고 싶어!>란 작품은 그런 의지를 담고 있으면서도 주의 주장을 직접적인 프로파간다로 드러내기보다는 귀여운 청춘 러브코미디로 버무렸다. 특히 교토애니메이션의 뛰어난 작화 퀄리티와 완성도 높은 애니메이션 제작을 통해 설득력 있는 작품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