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
[초이스]레전드 오브 래빗
순리준, 2011
2011년 부산국제영화제 때는 <무림토끼>란 제목으로 소개됐다. 원제는 <토협전기 兎俠傳奇>. 중국이 만든 첫 3D애니메이션이고, 3년 동안 150억 원의 제작비를 들였다. 제작진은 제목을 ‘쿵푸토끼’로 짓고 싶었겠지만, 왠지 자존심이 상해 다른 제목을 떠올렸을 거라 생각했다. 무술을 하는 토끼라는 설정에서 알 수 있듯이, <레전드 오브 래빗>은 <쿵푸팬더>를 본 중국인들의 화답이다.
주인공인 ‘투’는 호떡을 잘 만드는 요리사다. 무술을 배운 적은 없지만, 적어도 그가 호떡을 만드는 기술은 이미 쿵푸의 경지에 올라있다. 어느 날, 전국의 무림 지존들로부터 존경을 받던 원숭이 대사부가 한때 제자였던 판다 슬래시에게 배신을 당한다. 간신히 붙은 목숨으로 도망쳐 나온 대사부는 우연히 투를 만나고, 그에게 자신이 가진 신공의 기운을 전해준다. 그리고는 어릴 적 자신의 품을 떠난 딸 피오나를 찾아달라고 말한다. 도심으로 향한 투는 우연히 슬래시의 도장에서 일하게 되고, 피오니란 이름의 쿵푸 고수를 만난다. 두 사람은 각자의 자리에서 슬래시의 야욕을 막으려 노력하고, 투는 점점 자신 안에 내재된 쿵푸의 기운을 감지하기 시작한다.
중국의 애니메이터들은 <쿵푸팬더>에 얼마나 약이 올랐을까. <쿵푸팬더>는 아시아 문화마저 완벽에 가깝게 모사하는 할리우드의 흡수력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었다. 호권, 사권, 학권등 실제 동물들이 재현하는 쿵푸 동작부터 시푸가 포의 식탐을 이용해 훈련을 시키는 시퀀스까지, 중국이 만들었고 전 세계가 즐겼던 쿵푸영화의 잔재미들을 모조리 포함시켰다. 자국의 상징인 동물을 데려다, 역시 자국의 국기인 쿵푸를 소재로 삼은 할리우드에 대한 중국의 미움은 판다를 아예 악역으로 설정한 부분에서 나타난다. <레전드 오브 래빗> 속의 판다는 <쿵푸 팬더>의 판다보다 훨씬 큰 덩치에 무서운 표정을 하고 있다. 당연히 게으른 캐릭터가 아닌 그가 귀여워 보일 리도 없다. 심지어 이런 말도 듣는다. “눈에 마스카라만 칠하면 다 쿵푸팬더냐?”
부산국제영화제의 프리뷰 룸에서 이 영화를 보다가 마음 한 구석이 짠해졌다. 형형색색의 미감으로 담은 배경과 현란한 액션, 무엇보다 캐릭터에 대한 호감도는 <쿵푸팬더>에 크게 뒤지지 않는다. 하지만 이야기의 감흥은 <쿵푸팬더>에 미치지 못한다. 분명 <쿵푸팬더>를 먼저 보고 자란 아이들은 안타깝게도 <레전드 오브 래빗>을 <쿵푸팬더>의 아류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중국이 ‘짝퉁의 왕국’이라고 해도 제작진이 그걸 몰랐을까? 할리우드가 쿵푸영화의 관습을 연구해 창조한 결과물을 역수입할 때, 그들의 자존심은 더 상처받을 게 분명하다. <레전드 오브 래빗>은 어쩔 수 없는 딜레마에 관한 애니메이션이다. <쿵푸팬더>의 아류를 만들고 싶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쿵푸팬더>를 능가하는 애니메이션으로 자존심을 세워야 하는데, 결국에는 다시 중국이 무협의 지존이라는 사실을 드러내야 하는 상황. 그래서 결국 자신들이 그토록 사랑했던 동물을 저주해야 하는 딜레마라니. 애니메이션뿐만 아니라 모든 문화산업을 통틀어서 볼 때도 흔치않은 사례 일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