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초이스]가족초상화

김영조, 2007

[초이스]가족초상화 대표 이미지

최근 몇 달간 나를 사로잡은 다큐멘터리는 김응수 감독의 <아버지 없는 삶>이었다. 그리고 이번 ‘다큐멘터리 초이스’를 위해 염두에 둔 작품 역시 <아버지 없는 삶>이다. 그러나 내가 소속된 전주국제영화제를 둘러싼 지난 한달여의 파문 속에서 지금 이 영화에 대해 뭔가 말한다는 사실이 또다른 추문이 될수도 있겠다는 우려가 들었다. 결국 <아버지 없는 삶>을 잠시 유보하고 아버지에 관한 또다른 영화인 <가족초상화 -내 아버지와 나의 탈모>에 대해 이야기하기로 한다.

<가족초상화>는 2007년 마르세이유 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한 김영조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다.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영화제의 경쟁부문에 진출할 만큼 영화는 극적인 재미와 완성도를 두루 갖추고 있지만 한국 관객들에게는 생소한 영화다. 그 이유는 “촬영을 마치고 한국을 떠나기 며칠 전 아버지는 이 영화가 국내에 상영되지 않기를 간곡히 부탁하셨다”는 엔딩 자막에 충분히 나타난다. 복잡하게 얽힌 가족사에 관한 영화인 만큼 이 영화가 공개되었을 때 불가피하게 관계에 얽혀있는 이들이 난처해질수 있다는 점에서 국내에서의 영화 배급, 상영을 자유롭게 추진하지 못했던 탓이다.

유학을 며칠 앞둔 어느날,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는 감독에게 어머니는 아버지가 살아계시다는 폭탄선언을 한다. 자식에 대한 포기각서까지 쓰고 어머니를 떠나 다른 살림을 차렸다는 아버지. 어머니의 기억 속에서 아버지는 벌을 받아야할 인간이며 그가 남긴 아들 하나 잘키우는 것이 그에 대한 복수라고 생각하는 부정적인 기억의 대상이다. 자신의 인생에서 단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아버지라는 존재. 예기치않게 ‘아버지’라는 시험지를 받아든 감독은 고민 끝에 그를 만나러 간다. 그들은 어떻게 대면하는가? <가족초상화>는 감독이 아버지를 만나는 과정을 통해 기억 속에 부재하던 아버지가 서서히 의미있는 존재로 변화되어가는 과정을 흥미롭게 탐구하는 영화다. 

무겁고 드라마틱한 소재. 혹은 TV 이산가족 상봉 프로그램들이 즐겨 묘사하듯 감정과잉의 신파극이 될수도 있는 소재였지만 김영조 감독은 그러한 위험을 용케 피해간다. -내 아버지와 나의 탈모-라는 부제에서 짐작할수 있듯이 감독은 오히려 탈모라는 유전적 연결고리를 통해 비극적인 소재에 희극성을 살짝 얹으면서 영화가 신파극으로 추락하는 위험을 피하고 관객을 관찰자의 자리로 초대해 담담히 응시하게 한다. 

드라마를 엮어가는 감독의 솜씨는 경제적이고 안정적이다. 수십년을 등지고 살아온 어머니와 아버지, 아들이 처음으로 함께 식사하는 장면에서 감독은 가르마가 두 개인 사람은 결혼을 두 번 한다는 속담을 언급하며 자신의 이중 가리마가 아버지에게서 유전된 것인지 확인하고 싶은데 아버지가 이미 대머리가 되어서 확인할 수가 없다는 말을 툭 던진다. 부부의 정을 나눈 뒤에 수십년을 외면하고 살아온 남녀가 지난 세월에 대한 원망을 토로하는 이 긴장된 자리에서 천연덕스럽게 내던지는 아들의 말은 그 진지함으로 인해 오히려 관객을 ‘빵’터트리면서 영화에 마법같은 웃음가루를 흩뿌린다. 그러나 그렇게 무겁게 가라앉을 법한 순간에 한번씩 치고 들어오는 유머는 감독에 의해 치밀하게 계산된 서사전략의 일부이자 결과다. 돌이켜보면 관객의 눈물을 쥐어짤수도 있었을 순간에 감독은 냉정하리만큼 침착한 태도를 잃지 않는다. 그러한 침착함은 관객이 아버지라는 대상이 부재에서 존재로, 부정적 존재에서 긍정적 존재로 변화해가는 과정을 감정과잉의 부담을 벗고 관찰할수 있게 한다. 

영화는 짜임새있게 구성되어 있다. 러닝타임 65분에 달하는 영화는 정확하게 반으로 접혀지며, 오프닝과 엔딩은 수미쌍관을 이룬다. 오프닝에서 카메라는 암실에서 사진을 인화하는 감독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물에 잠긴 인화지에는 서서히 아버지의 형상이 나타난다. 아들 스스로 촬영한 것이 분명한 이 사진은 영화가 끝날 무렵에야 비로소 그 의미를 온전히 드러낸다. 다음 장면에서는 감독과 어머니가 집에서 사진을 찍는 모습이 나온다. 이 모자(母子) 사진에 부재하는 ‘대타자’로서의 아버지. 사진관에 가서 가족사진을 찍자는 어머니의 제안에 아들은 집에서 찍자고 하는데 그 이유는 비어있는 아버지의 자리가 어색했기 때문이다. 영화가 끝날 무렵 어머니와 아들은 다시 한번 가족사진을 찍는데 이번에는 사진관에서다. 물론 이 사진에도 역시 아버지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현상적으로 두 사진은 촬영공간만 바뀌었을 뿐 ‘아버지 없는’ 모자의 이미지라는 점에서 동일하다. 그러나 이러한 표면적 동일성 아래에는 양피지처럼 전혀 다른 이야기가 숨어 있다. 전자에는 두 사람에 의해 존재 자체를 부정당한 아버지라는 의미가, 후자에는 아내와 아들에게 존재를 인정받은 ‘부재자’ 로서의 아버지라는 의미가 붙어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버지를 괄호친 이 두개의 사진은 현상적으로는 동일하지만 실은 상반된 의미를 지닌 전혀 다른 사진인 것이다. 이 두 장의 사진은 부재에서 존재로, 무에서 유로, 부정에서 긍정으로 변화해가는 영화의 서사 진행 및 테마를 압축해 보여준다. 이 영화는 아버지라는 유령과 싸우며 그 실체를 긍정할 것인지, 부정할것인지 고민하는 영화다. 물론 결말은 긍정을 향해 나아간다. 

그러나 이러한 긍정은 쉽게 얻어진게 아니다. 그러한 긍정에 이르기까지 감독이 겪어야했을 내적 고민을 관객의 입장에서 상상하기는 쉽지 않다. 그 고민의 일단을 감독은 영화적 구성을 통해 보여주려 한다. 영화 전반부에서 아버지에 대한 어머니의 기억을 들으며 안정감을 취하던 카메라는, 감독이 청자의 자리에서 이탈해 이벤트 메이커이자 참여자로 자리를 바꾸는 순간 급격하게 흔들린다. 아버지의 도장 가게 앞에서 흔들리는 카메라는 아들의 심적 동요, 긴장감을 표현한다. 그러한 감정의 흔들림을 다스리면서 아버지의 가슴에 마이크를 꽂고 인터뷰를 진행하는 때가 러닝타임 33분 경과 후, 정확히 영화가 절반 정도 진행됐을 때다. 앞에서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던 아들은 이제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는다. 동일한 사건, 동일한 이야기에 대한 아버지의 버전이 시작된다. 영화의 표면은 조근조근하고 잔잔한지만 그안에서 발생하는 감정의 변화는 격렬하다. 세 사람이 저마다의 기억을 되새김질하고 발설하고 조정해 가는 과정. 그럼으로써 자신의 과거와 화해하고 존재를 긍정하고 관계를 복구하는 과정의 중심에는 ‘육체’가 있다. ‘탈모’라는 유전적 소인. 무언가를 기억한는 정신의 노동 과정을 관장하는 것은 결국 몸이다. 몸의 기억이고 감각이다. 몸의 카니발. 혹은 몸의 반란. 어쩌면 이 영화가 주는 즐거움의 하나는 거기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관련 영화인

불러오는 중입니다.

관련 영화글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