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로운영화리스트
타인을 상상하다
다음소희, 2023
# 씬 00
늦은밤 교복을 입은 한 소녀가 공중전화 부스에 있다. 빚잔치를 하고 부모는 도망을 가고 소녀는 잘 곳을 구하기 위해 친척들에게 전화를 해보지만 모두들 거부한다. 한겨울 새벽 항구, 대로를 졸면서 걷고 있는 소녀를 향해 대형 트럭이 다가온다.
# 씬 00
패쇄된 옛 기차역 근처에 지능이 조금 모자라는 아내와 잡역부 남편이 아이 둘을 데리고 산다. 몹시 가난한 그들에게 수도국 직원이 단수를 통보하고 물을 끊었다. 먹을 물도 씻길 물도 없던 이들은 두 아이를 데리고 마을의 카페로 갔다. 그곳에서 이들이 무슨 말을 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후 이들은 아이를 하나씩 안고 고속철도 선로에 누웠다.
# 씬 00
한 소녀가 저수지로 들어간다. 고등학교 현장실습으로 콜센터를 나갔고, 회사를 그만두면 안되냐고 부모에게도 말했고, 자살시도도 있은 후 였다.
위에 나열된 세 씬 중 첫 이야기는 아직 문학으로도, 영화로도 만들어지지 않았다. 두번째는 마르그리드 뒤라스가 ‘단수하러 온 남자’라는 글로 썼다. 마지막은 극영화 <다음 소희>의 한 장면이다. 우리는 소녀가 어떤 마음으로 자살에 이르렀는지 알 수 없지만, 이 영화는 그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상상의 공간을 열었다. 소녀가 죽기 전 하고 싶었던 말은 무엇이었을까? 자신의 생을 함축하고 있었을 그 말,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아 침묵으로 간직했을 그 말은 무엇이었을까. 이 영화는 누구도 주목하지 않은 삶이 어떻게 죽음으로 흘러갔는지를 상상한 미스터리이다.

마음에 걸리는 것은 소희의 죽음을 표현하는 단어, 자살이다.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 가능한가? 자살은 사회와 관계에서 쓸모없어진 존재를 스스로 지우는 적극적 행위처럼 보이지만, 수모의 공간에서 침잠된 인간이 마지막으로 다다르는 장소이다. 안타깝게도 수치심은 가난한 이들에게 더 가까이 있다. 부자들은 원하지 않는 말이나 힘든 일을 해야하면 수치심을 대리로 느낄 누군가를 고용할 수 있고 제도로도 만든다. 따라서 하청에 하청에 하청을 한 이 수치심은 사회 가장 낮은 곳에 배달된다.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수치심과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가난한 이들은 한 공간에서 불가사의한 공생을 한다. 가난한 자는 수치심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생계와 인간으로서 존엄을 지키고 싶은 삶 사이에서 고통받는다. 사람이 사는 곳, 세상으로서 ‘인간'에 가난한 이들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똑부러지게 할말 다 하던 소희도 자존감을 지킬 곳으로 죽음이라는 공간을 봤다. 자신이 사라져야만 스스로의 존엄을 지킬 수 있다는 아이러니 앞에서 우리는 이 자살을 더 이상 스스로 내린 선택이라고 치부할 수 없다. 영화는 자신의 목소리가 누구에게도 닿지 않고, 어떤 행동도 효과가 없다는 것을 인지한 후 그 모든 것을 정지하고 저수지의 침묵 속으로 들어가는 소희의 죽음을 보여준다. 영화는 형식적으로 소희와 이 사건을 조사하는 경찰 유진의 이야기로 나뉘어져있지만 카메라가 보여주는 것은 결국 감독의 시선이다. 1부는 누구도 듣지 않던 이의 이야기를 되살리는 영화이며, 2부는 자신의 권리와 이익만이 중요한 세상에 대한 통감이자 그 모든 상황에 있던 것이 우리의 동의라는 고해성사이다. 그러나 속죄의식이라기보다, 누군가 이 죽음 앞에 멈춰서 다른 막다른 길에 있는 누군가를 멈춰주었으면 하는 간절함이다.

모두가 소중한 존재이며, 사랑받아야 한다고 미디어가 떠들지만 정작 극단적 자본주의 속에 보호장치없이 사회를 돌아가게 하는 도구로서만 인간을 취급하기에 사람이 죽는 사회가 되었다는 서늘한 시선은 영화 전반에 명징하게 서려있다. 내가 살아남는 것이 타인의 고통보다 중요하고, 그 죄책감을 해시태그로 해결하는 사회를 감독이 영화 한 편으로 바꿀 수는 없다. 그런면에서 <다음 소희>에서 가장 언급하고 싶은 부분은 노래방 씬이었다. 음악도 음향효과도 거의없는 이 영화에서 가장 시끄러운 순간이다. 소희는 이승환의 ‘어떻게 사랑이 그래요'를 친구와 온 힘을 짜네 고함을 지르듯 부른다.
“너만을 사랑해, 너만을 기억해. 너만이 필요해, 그게 너란 말야”
아직 사랑을 제대로 해보지도 못했을 소희가 ‘죽음도 갈라놓지 못하는 사랑'을 이해한다기 보다, 좋은 음악이 가진 힘을 통해 마음의 고통을 토해내는 장면이다. 감독이 왜 이 노래를 골랐는지는 알 수 없다. 더 이상 춤도 추지 않는 소희에게 남은 것은 무엇일까. 이해도 안가고, 해결방법도 모르겠는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건 목놓아 소리치는 것 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그러나 만약 이들이 부르는 ‘사랑' 노래가 타인에 대한 사랑이라기 보다 자신에 대한 사랑을 일깨우는 방식이자, 감독이 소희에게 해주고 싶었던 말로 읽는다면 이해가 된다. 감독에게 소희는 노래 가사처럼 “그대는 나에게 끝없는 이야기 간절한 그리움”으로 다가갔을 것이다. 감독의 마음이 스크린을 통해 전이되는 순간, 관객은 뒤늦게나마 소희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한 사람이 된다. <다음 소희>는 우리가 알지 못한, 혹은 모른척 했을, 한 사람을 구체성을 가지고 이해하려는 시간을 단 2시간이라도 쏟게했다. 우리는 타인을 이해할 수는 없지만, 영화를 통해 그의 삶과 마음을 잠시나마 헤아려보는 시간을 가진다. 타인을 상상하는 영혼의 공간을 아주 조금 넓혀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