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
[초이스]가희와 BH
신동석, 2006
나온지 벌써 6년이나 지난 영화를 추천작이랍시고 주절거려보자니 사실 좀 부끄럽고 머쓱하다. 근 몇 달간 병적으로 시나리오 작업만 하느라 오로지 내 머릿속에서만 살다보니 요즘 다른 감독들이 무슨 생각하면서 영화를 만드는지 아예 관심을 두지 않은 탓도 있겠고, 그러다 마음먹고 극장에 가서 추천받아 마땅할 것 같은 영화를 봤는데 막상 보고 나니 시답지 않은 추천사 같은 건 별로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자신만만한 작품이었다거나, 그래서 그냥 추천하기 싫었던 영화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 이래저래 생각하다보니 왠지 만족스러운 느낌으로 떠오르는 영화가 하나 있었는데 그게 신동석 감독의 2006년작 <가희와 BH>다. 아마도 얼마 전에 헤어졌던 연인 사이인 것 같은 가희와 병화라는 젊은 친구들이 하루 저녁 동안 집안 곳곳을 돌아다니며 지난 연애의 추억 같은 것들을 조금 구슬프고 약간 신경질적인 톤으로 수다 떠는 내용인데, 이런 식의 설정을 가진 이야기가 대부분 그렇듯이 예상을 빗나가는 전개 같은 건 전혀 없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를 아주 좋아해서 꽤 자주 보는데, 볼 때마다 신기할 정도로 신선하다고 생각한다. 예전에 누가 이 영화를 두고 유럽영화의 감수성 어쩌고 하면서 평하는 걸 읽은 기억이 있는데 가끔 밤에 맥주 한 캔 따서 알딸딸한 기분으로 보면 정말 에릭 로메가 북가좌동 같은데 와서 학생들 데리고 후딱 찍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영화가 진짜 내게 어필했던 부분은 가희를 연기한 박진강이라는 배우의 ‘이제껏 없었던 여주인공 연기’다. 아무리 봐도 연기를 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이 사람은 지난 몇 년간 내가 본 영화과 학생들의 단편영화 가운데 최고로 유니크하고 누구와 붙어도 이길 수 있을 만큼 경쟁력 있는 매력을 가진 ‘진짜 주연배우’였다. 그래서 결국 제목처럼 이 영화는, 과거에 꽤 잘 놀던 아웃사이더라서 병화의 짝사랑의 대상으로 군림했던 그녀가 이제는 몸이 부서질 정도로 알바하며 생활 밀착형 고민을 가진 나이 먹은 여자가 되어 마침내 이니셜로만 남은 과거의 남자를 추억에 묻는 고통스런 극복의 과정에 대한 이야기로 끝날 수 있었다. 그건 박진강이라는 배우의 아슬아슬할 정도로 신경질적인 존재감이 이 영화에 심어준 우아한 입체성이라 할 수 있겠다. (이 글을 쓰는 도중에 검색해보니 이 분은 한예종 미술원을 나와 지금은 한국은 물론 외국에서도 수차례 개인전을 가진 진짜 아티스트셨다. 우왕) 아무튼 요즘 화제가 되는 단편들은 왠지 다들 협박조의 느낌을 주는 무시무시한 영화들이 많던데, 작품이 널리 퍼지는데 그런 이야기가 도움이 될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추천작 소개해달라고 해서 꺼내 보고, 주말 저녁에 맥주 한 캔 따서 편하게 소파에 기대어 보면서 만족스럽게 잠들게 될 정도로 자주 보고 싶어지진 않겠더라. 그래서 이런저런 이유들로 나는 이 영화를 좋아하고 자주 보며 이렇게 추천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