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
[초이스]사이비
연상호, 2013
연상호 감독의 저예산 독립 장편애니메이션 <사이비>가 2013년 11월 21일 개봉하며 전국에 <돼지의 왕> 이후 다시 한 번 화제를 불러 모았다. ‘사회고발’, ‘리얼리티 잔혹 스릴러’ 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며 ‘쎈’ 영화의 대명사로 불리는 연상호 감독의 작품들은 그의 단편 <지옥> 시리즈에서부터 예고되었다. 주제에 대한 끈질긴 일관성으로 감독의 사회의식과 세계관이 기존 한국애니메이션들과는 차별성을 가지며 마니아층을 형성하고 있다.
작품을 보면서 애니메이션이라는 생각보다는 실사영화를 한편 보는 듯 색다른 느낌이랄까? 이러한 느낌은 <돼지의 왕> 때 아쉬웠던 작품의 미술적, 애니메이션적 완성도가 많이 보강된 점과 스토리와 캐릭터 설정의 탄탄함을 바탕으로 한 연출적 완성도에 의한 것이었다. 물론 아직도 동작이 뻣뻣하고 표정이 풍부하고 깊이 있게 표현되지 못하는 기법상의 문제가 눈에 거슬렸지만 저예산이라는 한계를 감안한다면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연 감독의 첫 번째 장편 <돼지의 왕>이 20개 관 내외였던 것이 비하면 <사이비>는 New의 투자배급으로 개봉관이 80개 관으로 늘어났으며, 그에 힘입어 한 달이 안 되는 기간에 관객 2만을 돌파했다. 3억 5천 정도의 제작비와 2억 정도의 마케팅비(영진위 개봉작 지원 포함)를 모두 다 합친다 해도 5억 내외로, 평균 제작비만 30억 내외의 기존 상업 작품의 6분의 1에도 못 미치는 초저예산 장편애니메이션으로서는 높이 평가할 수 있는 기록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낙관적인 평가는 아직 금물이다. 연 감독의 작품은 호불호가 명확히 갈리고 마니아층마저 비판적인 목소리를 서슴지 않는 적극적인 소수가 지지하는 영화이기에 초기 관객유입은 오래가지 못했고 상식적인 예상 성적표를 거두었기 때문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지르는 무모해 보이는 도전에 답답한 현실의 벽은 조금씩 무너질 수 있지 않을까.
<사이비>는 이미 국내 개봉 전부터 해외 유수 영화제에서 주목을 받았는데 지난해 10월 20일 폐막한 제46회 시체스국제영화제에 초청되어 애니메이션 최우수작품상을 받았다. 또한 같은 해 스페인에서 열린 제51회 히혼국제영화제에서도 장편애니메이션부문 최우수상을 받았는데 11편의 경쟁작과 겨루어 <치팅>(미국, 빌 플림튼)과 공동 수상함으로써 국제적인 주목을 받을 수 있었다. 이뿐만 아니라 제86회 아카데미 장편애니메이션 부문 예비후보로 선정되는가 하면 최근엔 포르투갈 판타스포르토국제영화제 각본상 수상, 네덜란드의 권위 있는 애니메이션영화제인 제17회 홀랜드 애니메이션 페스티벌 그랑프리를 수상하는 등 해외의 반응과 평가가 오히려 더 뜨거운 것 같다.
<돼지의 왕>이 덜 정리된 듯한 스토리와 극 구성이라면 <사이비>는 보다 세련되고 매끄러운 극 구성임에도 힘이 넘쳐났다. 작품의 이야기와 캐릭터들을 살펴보면 단순한 주제의식과 주인공 캐릭터인 김민철(양익준)의 쎈 캐릭터가 돋보였으며 진실을 밝히고자 하는 뼈가 사무치는 사투는 보는 이로 하여금 영화적 현실을 질리게 만든다. 상대역 최경석 장로(권해효)의 평범한 마스크 속의 전형적 죄질 나뿐 사기꾼 또한 영화를 더욱 드라마틱하게 만들어준 캐릭터다. 여기에 한배를 타게 된 젊고 매력적인 성철우 목사(오정세)의 막판 파국은 신의 전도자 이전에 인간의 나약한 본성에 들어선 사악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그리고 김민철의 딸 김연선(박희본)은 포악무도한 가부장의 전형인 아버지의 피를 뼛속까지 거부하며 처음으로 자신의 존재가치를 깨달으며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캐릭터다. 그 밖에도 무능하기 그지없는 공권력과 무지하고 허황한 사이비 종교에 빠져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수몰지역 주민들은 다소 과장되고 극단적인 인물들로 설정된 것 같지만 오늘날 대한민국의 굴곡진 현대사의 숨기고 싶은 어두운 자화상이 아닌가 한다.
종교적 소재를 다루지만 종교가 아닌 진실과 거짓에 대한 파헤침을 통해 결국 도달하는 것은 무엇이 진실이고 참인가 라는 질문이다. 우리가 맞이하는 일상의 사투가 무엇을 위한 것이었던가를 김민철의 캐릭터와 주변 인물들을 통해 성찰하게 하는 것이다. 마지막 김민철의 토굴 속의 이율배반적인 행위은 인간적 한계와 본질에 대한 관객에게 던지는 감독의 선문답과 같은 것이리라.
이러한 연 감독의 저예산 속도전을 통한 성공전략은 일찍이 세계 어느 스튜디오에서도 시도된바 없는 독창적인 전략으로, 시장기반이 좁고 허약한 한국에서 탄생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적은 예산은 스튜디오 규모의 최소화, 빠른 제작기간, 제작기술 효율성을 극대화, 지원사업의 적극 활용, 국제적 영화 무대의 공략이라는 전략 하에 산학협력을 통한 신진인력을 활용한 디지털제작시스템의 적극 활용 등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개봉 이후 얼마 안 돼서 벌써 세 번째 장편 프리프로덕션이 마무리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감독으로부터 전해 듣고 연상호 감독만이 할 수 있는 속도전에 혀를 내둘렀다. 차기 작품은 <서울역>이라는 장편으로 공포의 비판적 은유로 한국사회에 문제를 던지는 야심 찬 작품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