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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이스]자, 이제 댄스타임

조세영, 2013

[초이스]자, 이제 댄스타임 대표 이미지

늘 다니던 지하철역 스크린 도어에 월경전증후군 치료제 광고를 보았다. 반사적으로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었다. 생리가 남성의 것이었다면, 관련한 증상들에 대해 그냥 견뎌야 하는 것으로 여겨지지는 않았을 것이란 인식이 있은 후 20여 년이 지났다. 반가움보다는 지배적 언어에 익숙해져 버린 현실 속에서 반사적으로 사진을 찍는 모습이 우스운 것이다. 말에도 안개가 있다. 어떤 말은 그 앞에 서면 모든 것이 희미해지고 더 나아갈 수 없다. <자, 이제 댄스 타임>은 그런 종류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조세영 감독과 젊은 창작자들은 조심스럽지만 적당한 속도로 그 안갯속에 걸어 들어간다. 뿌연 화면은 안개와 같은 여성의 몸에 대한 언어인 동시에 관객에게 안전장치를 제공한다. 그리고 그 뿌연 화면이 걷히면 함께 길을 걸어야 한다. 여성의 몸에 새겨진 것들을 함께 보기 위해서. 

<자, 이제 댄스 타임>은 여전히 ‘낙태’(굳이 이 단어를 쓰는 이유는 이 단어가 가지고 있는 폭력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맥락을 드러내고 싶어서다. 그리고 이러한 이유가 또한 폭력적으로 여겨질 수 있다는 것을 창작자에게 전달하기 위해서다.)는 안개와 같은 말이다. ‘낙태’를 이야기하면서 이 사회는 여전히 태아의 생명권을 이야기하고 무책임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불안전한 섹스를 만들어내는 사회와 그 불안을 혼자 겪어내야 하는 여성의 몸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여성의 몸은 덩어리가 아니다. 나이 든 어머니들이 자식의 생일을 몸으로 기억하는 것처럼 몸은 말로 표현되지 못하는 것조차 기억한다. 

<자, 이제 댄스 타임>의 인터뷰들은 안갯속에 있는 존재들처럼 있지만 없는 것으로 여겨졌던 것들을 ‘있게’ 만드는 과정이다. 초반 뿌연 화면이 걷히듯이 그들의 존재가 이미 ‘있다’고 이야기한다. 인터뷰들이 ‘있게’하는 과정이라면 극영화 부분(혹은 재연)은 현실에 ‘있지만 없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 있어야 할 자리를 만들어준다. 그렇다고 극영화 부분이 ‘연애’, 임신, 선택 그리고 수술이라는 명확한 단어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 과정을 겪어내는 여자의 감정들이 담긴다. 극영화 부분을 통해 표현되는 감정들과 언어화되지 못했던 기억들이 만나면 관객은 조금은 수월하게 안갯속을 걸을 수 있다. 

주인공을 대상화시키는 것을 꺼리는 다큐멘터리 장르상의 특성에도 기인하겠지만 <자, 이제 댄스 타임>은 젊은 여성 창작자들과 등장인물의 함께 만든 작업이라고 해도 좋다. 창작자들과 등장인물들은 가능한 시야를 확보하며 거리를 만들고 안갯속을 걷는 격이다. 더디지만 그래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덕분에 우리는 <자, 이제 댄스 타임>을 통해 만나지 못했던 ‘말’을 만나게 된다. 누군가는 아프고 누군가는 위안을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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