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초이스]액트 오브 킬링

조슈아 오펜하이머,크리스틴 씬, 2012

[초이스]액트 오브 킬링 대표 이미지

<액트 오브 킬링>은 20세기 사상 가장 잔혹한 독재정권 가운데 하나로 알려진 인도네시아 수하르토 정권 치하에서 벌어진 1965년 대학살을 다룬 다큐멘터리다. 베르너 헤어조그와 에롤 모리스가 executive producer를 맡은 것으로도 유명한 이 영화는 2013년 한해 전 세계적으로 가장 뜨거운 다큐멘터리였다. 대학살을 다룬 다큐멘터리들이 대개 피해자들의 증언을 담은 인터뷰와 기록화면을 교차시켜 내용을 채워나가는 것과 달리 이 영화는 학살자들이 자신들의 학살 행위를 증언하고 나아가 아예 학살을 천연덕스럽게 영화로 ‘재연 re-enact’한 경악스러운 영화다. 학살자들이 공개된 장소에서 무용담 이야기하듯이 자신들의 행위를 떠드는 것도 놀랍지만 증언에 그치지 않고 아예 환상적인 뮤지컬 영화로 학살을 재연하는 것을 보면 충격을 넘어 거의 인간의 악마성에 대한 공포를 느끼게 한다. 대중의 보편적인 역사인식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그들의 의식과 행동은 역사와 책임, 실재와 허구, 현실과 상상 혹은 초현실의 경계에 관한 우리들의 인식에 일대 혼란을 일으키면서 현실 감각을 무너트리는 기이한 체험을 하게 한다. 1997년 아시아를 덮친 금융 위기 속에서 수하르토는 권력을 잃었지만 그가 실권한 지 20년이 가까워지도록 아직까지 백만여 명의 목숨을 앗아간 학살자 가운데 단 한 사람도 처벌받지 않은 나라가 인도네시아이다. 이런 나라에서 도대체 어떻게 이런 영화가 만들어질 수 있었을까? 

영화는 1965년 학살 생존자들의 거주 지역인 메단 지역 외곽에서 감독이 플랜테이션 노조를 건립하려는 노동자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구체화되기 시작한다. 메단 지역은 <액트 오브 킬링>의 주인공인 학살자 안와르 콩고가 과거에 극장을 운영했던 곳이기도 하다. 조슈아 오펜하이머 감독은 노조 건립을 위해 열성적인 노동자들이 정작 이 문제에 대해 발언하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하는 이유가 과거 학살의 공포스런 기억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공산주의자로 매도되어 무차별적으로 학살되었던 트라우마 적 경험은 그들로 하여금 어떤 말도 발설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게 만들었다. 청산되지 않은 과거는 여전히 진행 중인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피해자들이 증언을 꺼리는 상황에서 영화의 물꼬를 튼 것은 사건의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들에게 그 사건에 대해 묻는다’는 발상의 전환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아이디어를 제공한 이들이 바로 학살의 피해자들이었다는 사실이다.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에게 학살에 대해 묻고 그것을 영화화하라. 놀랍게도 학살자들은 마을 생활을 촬영하고 싶다는 감독의 말을 순진하게 믿었고 영화 작업에 대해 매우 협조적이었다. 웃지 못할 것은 그들이 감독을 믿은 이유가 감독이 미국인이었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영화 속 한 인물이 말하듯이 아메리카 원주민 대학살이라는 원죄를 통해 자신들의 나라를 세웠을 뿐 아니라 근래에는 동티모르에서 독재자를 지원한 미국 국적의 감독이라면 당연히 자신들의 편일 것이라는 ‘우직한(?)’ 믿음이 카메라와 대상 사이에 뭐라 표현하기 어려운 참으로 난감한 신뢰 관계를 형성시킨 것이다. 감독에 의하면 학살자들에게 친절하게 대하고 드러내놓고 판단하지 않는 한, 그는 학살자들의 내면까지 모두 카메라에 담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물론 그 자신 홀로코스트로 가족을 잃은 트라우마를 지닌 유태계 출신의 감독으로서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에게 이 영화를 만드는 것은 유대인 대학살에 책임 있는 나치 장교들이 승리자의 관점에서 홀로코스트를 판타스틱하게 자랑하는 것을 영화화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감독에게 얼마나 고통스런 체험이었을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영화의 중심인물인 ‘안와르 콩고’는 카메라의 주요한 관찰 대상이자 감독과 매우 긴밀하게 상호작용하는 대상이다. 그는 카메라 앞에 선 피사체이자 감독의 창조적인 조력자이다. 살인 갱단이 영웅으로 추앙받는 이 나라에서 그는 과거 자신이 탐닉한 할리우드 영화에서 영감을 얻어 살해 방법을 고안했다고 증언하고 다양한 할리우드 장르 스타일을 인용해 ‘학살 뮤지컬’을 연출한다. 이 영화는 매우 잔혹하면서 동시에 판타스틱하다. 영화의 이러한 충돌하는 정서와 이질적인 감각은 당연히 관객을 매우 불편하게 만든다. 안와르 콩고를 비롯한 마을 사람들 다수가 참여한 이 영화에서, 현실에서 가해자였던 이들이 피해자 역할에 몰입되어 고통의 눈물을 흘릴 때 우리는 도대체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매우 혼란스러워진다. 가해자들은 상황극을 수행하면서 피해자들의 고통에 전이된 것인가? 안와르 콩고가 밤마다 악몽에 시달린다고 고백하면서 구토하는 엔딩 장면에서 우리는 영화와 폭력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진심으로 난감해진다. 이 영화는 무엇을 질문하는가? 우리는 이 영화를 보면서 모방 폭력을 낳기도 하고 반대로 폭력을 성찰하게도 하는 영화의 힘에 대해 말해야 할까? 현실과 영화는 어떠한 관계를 맺는가? 학살자들이 만든 ‘영화 속 영화’와 그것을 기록하는 감독이 만든 영화의 관계는? 학살, 혹은 집단적 폭력에 대해 두 개의 영화는 어떤 식으로 서로를 비추는가?

그러나 이러한 혼란스러운 질문이 강화되는 순간이 있다. 과거 자신이 사람을 죽인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자신의 목이 잘려나가는 순간을 재연하던 안와르 콩고는 공포와 두려움에 사로잡혀 끝없이 눈물을 흘린다. 그러나 바로 뒤에 우리는 집에 돌아와 어린 조카를 불러 자신이 살해당하는 장면을 TV로 함께 시청하는 안와르 콩고를 보게 된다. 마치 한편의 명화를 감상하듯이 자신이 잔인하게 살해당하는 장면을 손자와 함께 시청하는 안와르 콩고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그의 눈물이 과거 자신이 저지른 행동에 대한 죄의식에 사로잡힌 반응인지, 극에 몰입된 메소드 배우의 뛰어난 연기에 불과한 것인지 혼란스러워진다. 이러한 모호함은 이 영화가 보여주는 집단적 폭력과 광기에 대해 쉽게 답할 수 없는 질문을 연이어 던진다. 한 사회가 생산한 정치적 광기와 폭력의 편재성. 극악한 참극을 겪고도 어느 누구도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 상황의 난감함. 죄의식이라는 감정이 집단적으로 괄호 쳐진 상황에서 발생하는 혼란과 모호함이 우리를 불편하다 못해 불쾌하게 하는 것은, 어쩌면 이 영화가, 우리가 진정으로 인정하기 두려워하는 것 즉 그들이 우리와 다른 차원의 괴물이나 사이코패스, 미개한 부류가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은 아닐까? 그렇다면 그들을 괴물이나 사이코패스 취급하는 것은 사실상 그들과 우리를 분리시켜 우리의 야만성과 광기, 폭력성을 부정하고자 하는 자기 기만적 의지에 불과하다. <액트 오브 킬링>의 피해자들이 과거에 대해 발설하는 것에 대해 극도로 두려워하는 것과 유사한 모습을 우리는 근래의 한국 독립 다큐멘터리에서 똑같이 목격한다. 구자환 감독의 <레드 툼>에서 국민보도연맹 학살의 희생자들은 왜 아직도 그들에게 일어난 일을 증언하기를 두려워하는가? 우리 사회가 과연 인도네시아에서 벌어진 사건에 대해 초현실적이고 괴물스럽다고 말할 자격이 있을까? 이 영화를 보면서 불현듯 든 의문이다. 

관련 영화인

불러오는 중입니다.

관련 영화글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