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
[초이스]전봇대, 당신
이진우, 2014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을 건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아버지를 따라가지만 공기업 민영화의 선두주자 KT의 역사를 끄집어낸다. 아니, 신자유주의 시대에 노동자가 어떻게 퇴출되어 가는지를 차분하면서도 씁쓸하게 담아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진우 감독의 <전봇대, 당신>이다.
한 남자가 길을 걷는 것으로 시작하는 이 작품은 기본적으로 아버지의 과거에서 현재에 이르는 시간 축을 따라간다. 연대기적 구성 축을 중심으로 하지만, 순차적인 전개를 따른다기보다는 현재의 시점과 과거의 설명이 교차하는 방식을 선택한다. 전체적으로 차분하게 하나씩 하나씩 설명하는 식이 인상적이다. 빠른 전개를 통해 사건을 강조하거나 인물이나 상황에 대해 몰입을 할 만한데, 다소 다른 선택이다. 사건들은 각 단락마다 정보를 제공하거나 상황을 충실히 보여주는 방식을 보여준다. 이렇게 따라가다 보면 아버지의 모습이나 감독의 성격이 직간접적으로 전해지게 된다.
감독의 아버지는 한국의 대표적인 통신회사인 KT 노동자였다. 지금은 정년퇴직했지만, 유능한 사원이자 노동자로서 신입사원들에게 KT의 가치와 업무에 대한 첫 교육을 담당했던 사내교수였다. 우체국 업무와 통신 업무를 병행했던 체신부 시절부터 시작하여, 한국전기통신공사 그리고 민영화된 KT의 노동자로서 오랫동안 근무했다. 그러나 마지막 근무는 지역근무에다 단순업무 배정, 퇴출 압력을 버티는 시간이었다. 반면에 낙하산 인사와 임원 비리, 민영화 문제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지는 않았다. 아버지의 회사 이력에 덧붙여 가족의 변화가 사이사이 전개된다. 조용하고 차분한 이야기 전개 속에서 KT의 주주 총회와 인력퇴출 프로그램에 관한 시퀀스는 아버지를 뒤따르던 카메라에게 약간의 파동을 일으킨다. 아버지와 아들이 마지막으로 닿는 장소는 아버지의 추억 속에 강하게 남아있던 연수원이다. 이 장면은 현재 아버지와 아들의 상태를 드러내는 여백의 공간을 만들어낸다.
1인칭 시점의 <전봇대, 당신>은 어쩌면 두 가지 전략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하나는 KT를 통해 민영화의 폐해와 구조조정의 실체를 드러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아버지로서 살아가는 것에 대한 애잔함 혹은 이해이지 않을까. 아마 감독은 이 두 가지 모두에게 아쉬움을 갖고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아버지를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과 감정을 낮고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점은 눈여겨볼 만하며, 공기업이 민영화되어 어떻게 달라졌는지는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는 시사적이다. 무엇보다 과하지 않게 이야기를 끌고 가는 호흡이 관객들을 숨차게 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