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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이스]두 개의 문

김일란 , 홍지유, 2011

[초이스]두 개의 문 대표 이미지

그날 아침. 아침 뉴스를 켜는 순간 화염에 휩싸인 남일당의 망루가 보였다. 누군가 “저기 사람이 있다”라는 절규를 하고 있었고, 아슬아슬하게 난간에 매달려 있던 남자는 결국 콘크리트 바닥으로 추락해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뉴스를 보도하던 기자의 긴박한 음성과 하염없이 반복 재생되던 불타는 망루, 사람들의 흐느낌 그리고 추락한 채 방치돼 경련을 일으키던 남자의 처참한 육체... 무언가 거대한 쇳덩이로 얻어맞은 듯한 아찔함. 그리고 이윽고 찾아왔던 공포. 그날 용산에서 벌어졌던 일들은 이미 짐작하고 혐오했던 현 정권의 본질을 드러내는 사건으로서만이 아니라, ‘통치’의 새로운 국면을 보여주는 듯 했다. 저들은 두려움을 모른다(그래서 죄의식도 수치도 없다). 자신들의 권력과 목표를 위해서라면, 살아남기 위해 칠순이 넘은 노인이 기어이 올라가야만 했던 그 망루를 단 하루만에 불태워버릴 수 있는 자들이다. 무서웠다.

지난해부터 독립영화 진영에서 용산을 직간접적인 방식으로 상기하는 영화들이 상당히 등장했다. 거친 다큐멘터리 방식으로, 때론 실험영화의 묘한 추상적 감성으로 용산은,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날 화염에 휩싸였던 남일당의 모습은 영화 속 이미지로 소환됐다. 영화에서 ‘상기’라는 의미는 대단히 중요하다. 망각의 저편에서, 망각의 정치적 효과(망각된 역사는 존재하지 않았던 역사와 다를 바 없어진다)에 반대하며 소환되는 이미지는 용산을 둘러싼 아직 해결되지 못한 많은 문제들을 현재형으로 끄집어낸다. 용산은 분명 지속적으로 상기되고 논쟁되고 싸워야할 문제로 남아 있다. 그러나 때로는 불타는 남일당의 이미지들이 어떤 영화 속에서는 지독히도 외설적인 방식으로 비쳐졌고 그래서 불편했다. 용산은 발언되고 상기돼야 하는 문제지만, 그 과정에 이미지의 윤리학과 정치학은 숙고되어야 한다. 

<두개의 문> 역시 오프닝 타이틀이 뜨기 전에 화염에 휩싸여가는 남일당, 그 망루를 비춰준다. 불길이 솟아 오르기 전 조그만 구멍으로 머리를 내밀던 사람, 그리고 이내 시뻘건 불꽃과 함께 화염에 휩싸이는 망루. 나는 조금 전 얼굴을 비쳤던 그가 화염에 휘말리게 될거라는 걸 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다섯 명의 사람들이 가장 고통스럽고 극악스런 방식으로 죽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무력하다. 이 영화는 그들의 잔혹한 죽음을 목도하고도 방관자로만 남아있던 나의 죄의식을 소환한다. 회피하고 싶지만 차마 회피할 수도 없는 고통스런 대면이다. 

이 영화는 그날 남일당에서 불타올랐던 죽음의 이미지, 폭력과 학살의 이미지, 억울한 주검의 스펙터클을 통해 관객의 죄의식을 자극한다. 누군가의 죽음, 진짜 죽음을 이미지로 인용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윤리적, 정치적 올바름의 문제를 동반한다. 그러한 윤리적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두개의 문>은 지금까지 나왔던 용산에 관한 작품 중 가장 세련되고 완성된 태도를 보여준다. 논증적으로 사건에 접근하는 태도는 물론이고, 그날 새벽, 기계화된 병정처럼 명령에만 충실했던 특공대들의 집단적 움직임들은 마치 호러 영화 속 한 장면처럼 편집됐다. 살고자 했던 욕망들과 죽음에 대한 공포, 그리고 반성없는 권력의 잔혹한 명령들이 뒤섞이면서 그날은 결국 아비규환의 생지옥으로 치달았다. 

이미 앞서 게재되었던 맹수진 평론가의 지적처럼 재연과 증언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이 작품은 일면 에롤 모리스의 다큐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다른 점이 있다면, 이 영화는 살아남은 자들의 말을 빌어 진실에 가 닿겠다는 욕망을 접고 시작한다는 점이다. 이 영화가 말하는 진실이란, 그날 그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죽었는지, 검찰이 왜 자료들을 은폐했는지, 그 망루 안에서 죽음 직전에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 진압대가 느끼는 공포와 아비규환은 또 무엇이었는지를 논증하는 것이 아니다. 이 영화는 그날, 2009년 1월 20일 새벽, 삶의 최소한의 보장을 요구하며 망루에 올라갔던 사람들이, 단 하루만에 정권에 의해 처참한 주검으로 내려와야만 했다는 그 ‘사실’을 증언한다. ‘진실’은 사법부에서 공방했던 것처럼, 망루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가가 아니라, ‘그날 그들이 죽었다’는 사실 그 자체이다. 

<두개의 문>은 그날의 진실이 망각의 늪으로 빠져드는 것에 반대한다. 저항은 ‘상기’에서 시작된다. 폐허아래 은폐된 주검들, 권력의 전승기념비 아래 묻혀버린 진실들은 지속적으로 말해져야 한다. “과거로부터 희망의 불꽃을 점화할 수 있는 재능이 주어진 사람은 오로지, 즉은 사람들까지도 적으로부터 안전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투철하게 인식하고 있는 특정한 역사가뿐인 것이다. 그런데 이들 적은 승리를 거듭하고 있다.“ 독일의 철학자 발터 벤야민이 『역사철학 테제』에서 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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