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
[초이스]천공의 성 라퓨타
미야자키 하야오, 1986
- 일본의 애니메이션 잡지 <애니메쥬> 1986년도에 실린 독자 인기 캐릭터 순위. 1위는 해당 잡지에 만화판이 연재되고 있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의 주인공 나우시카가 엄청난 격차로 압도적인 수위를 차지했지만, 2위와 6위에 <천공의 성 라퓨타>의 두 주인공 시타와 파즈가 올라 1986년 개봉 당시의 <라퓨타> 인기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케 한다.
필자는 지금까지 이 추천애니 코너에서 쭉 한국 애니메이션만을 다뤄왔다. 이번에는 일본의 고전 명작 애니메이션인데, 이 글을 쓰고 있는 시기에 일본 인터넷에서 화제가 된 작품이 있어서 처음으로 일본 작품을 다뤄볼까 한다. 애니메이션 영화 <블러드 더 라스트 뱀파이어>를 연출한 키타쿠보 히로유키 감독이, 미야자키 하야오의 초기 대표작 중 하나인 <천공의 성 라퓨타>(이하 <라퓨타>)를 미야자키 감독 스스로는 ‘실패작’이라고 생각한다는 사실을 밝혔다가 애니메이션 팬들 사이에서 논쟁이 벌어진 것이다.
■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라퓨타>를 실패작이라고 말했다?
지난 5월 중순, 일본의 애니메이션 감독 키타쿠보 히로유키씨가 트위터에서 발언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천공의 성 라퓨타>를 실패작이라고 생각한다”는 발언이 일본 인터넷을 떠들썩하게 했다. 키타쿠보 히로유키씨는 1979년 15살 때에 <기동전사 건담>의 원화를 담당하면서 애니메이터로 데뷔한 감독으로, 1985년 첫 감독작품인 (<크림 레몬> 시리즈) 이후 옴니버스 작품 <로보트 카니발>에서 <메이지 기계문명 기담 ∼홍모인 습래지권∼>의 감독과 시나리오를 맡았다. 그리고 <블랙매직 M-66>(감독·캐릭터디자인), <죠죠의 기묘한 모험>(감독), (감독) 등의 작품에 참여했으며, 극장애니메이션인 <노인Z>(1991년/감독), (2000년/감독) 등을 연출한 바 있다.
그런 베테랑 감독이 한 발언인 관계로 일본의 애니메이션 팬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었는데, 정확한 발언 내용을 인용하자면 아래와 같다. (트위터에서 한 발언인 관계로 구어체로 써있는 것을, 필자가 어느 정도 의역해서 문장으로 만들었다.)
2012년 5월 18일 23시 29분 19초∼5월 19일 00시 20분 30초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을 말해보자→ ‘대디’ 미야자키 감독 자신은 <천공의 성 라퓨타>를 실패작이라고 싫어한다.”
“대디 미야자키 감독이 아니더라도, 창작자라면 <라퓨타>가 ‘실패작으로 보여야’ 하는 것이 상식. Boy meets Girl로 시작되는 스토리에서 ‘주인공은 파즈’, 즉 구조상 주브나일로 성립시켜야 하는데도 설정은 물론이고 가치관까지 전부 부자연스럽게 밸런스가 무너져 있다.”
“주브나일, 즉 모험소년이야기로서 성립되지 못하고 있다. 우선 탄광부스러운 일을 하면서 미트볼 하나 덤으로 받은 것 가지고 좋아하던 소년이, 부모님도 없이 그렇게 많은 비둘기를 어떻게 키우고 있는가? 정보부가 시타를 잡아가면서 넘겨준 금화를 버리지도 못할 정도이면서.”
“스토리의 고조점이 클라이맥스가 아니라 시타 구출 장면이 되면서 본래 가장 중요한 모티베이션인 ‘아버지가 발견한 천공의 성이 실제로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단순한 통과점이 되어버렸다는 점.”
“게다가 모험 이야기의 왕도인 ‘주인공의 성장과 활약으로 곤란을 극복하여 카타르시스를 얻’어야 하는데도, 사실상의 최종 결정은 파즈가 아니라 시타가 이미 결심을 하고 있었고, 파즈의 선택도 마찬가지로 멸망의 주문을 외치는 할복 자살 만세 공격일 뿐. (중략)”
“가장 가치관이 붕괴했다고 보이는 상징적인 부분으로는, 라퓨타에 도착한 병사들이 보물을 꺼내는 지극히 당연한 행동에 대해서 ‘정말 나쁜 짓을 하네’라고 시타한테 말해놓고서, 라스트에서는 도라 일행이 몰래 숨겨온 보물을 보며 미소짓는 황당함. 세세한 부분까지 예를 들자면 끝이 없으니까 이 정도로 멈추겠다.”
(※주브나일(juvenile) - 소설 장르의 하나로, 영미권에서는 ‘영 어덜트 픽션(young adult fiction)’이라고 한다. 틴에이저(10대 청소년)를 대상으로 하는 소설을 말하는데, 1802년 영국 작가 사라 트리머(Sarah Trimmer)가 14세부터 21세까지의 독자를 ‘영 어덜트후드(young adulthood)’로 구분지은 데에 유래한다. 19세기에 발표된 작품 중 <올리버 트위스트> <몽테 크리스토 백작> <톰 소여의 모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보물섬> <정글 북> 등을 주브나일로 구분하는 경우가 많다. 일본에서는 1970~80년대에 ‘영어덜트소설’보다 ‘주브나일’이란 단어가 주로 사용되었는데, 1990년대 이후 ‘라이트노벨’이란 신조어에 밀려 이제는 잘 사용되지 않는 일종의 역사적 단어이다.)
■ “<라퓨타>는 실패작” 발언에 대한 반발과 키타쿠보 감독의 본의
물론 키타쿠보 감독의 이 발언에는 여러 가지 이견과 반발이 일어났고, 그에 대해 추가로 이런 발언도 남기고 있다.
“가치관이 무너져 있지만 <루팡 3세 칼리오스트로의 성>은 성공적이었습니다.”
“또한 <라퓨타>의 실패가 없었다면 <이웃집 토토로>의 대성공도 없었을 것이기에, 플러스 마이너스로 따져본다면 약간 플러스겠죠.”
“작품으로서 감독 본인이 좋아하든 싫어하든 관계없이 좋아하는 관객 분들이 계시고, 흥행적으로도 물론 성공했습니다. 그와 유사한 사례라면 <초시공요새 마크로스: 사랑·기억하고 있습니까>가 있겠죠.”
또한 키타쿠보 감독은 팬들의 반발에 대해 “내가 언제 <라퓨타>가 재미없다고 했느냐”, “제작자와 관객은 같은 사고 루틴을 가질 수는 없는 법”, “제작자에겐 좌절이 있기 때문에 다음 번에 꼭 만회하겠다는 강한 모티베이션으로 이어지는 것”, “설령 흥행에 성공하더라도, 자기자신이 느낀 반성점을 회피하는 태도로는 작품의 질이 향상되기를 기대할 수 없게 된다”는 발언도 추가하고 있다.
그 말을 받아들인다면, 키타쿠보 감독 역시 관객으로서 <라퓨타>를 싫어한다거나 개인적으로 재미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런 발언을 한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다만 창작자, 크리에이터로서의 입장에서, <라퓨타>란 작품이 설정된 캐릭터를 올바르게 스토리로서 구성해내지 못한 작품, 즉 ‘실패작’이라고 생각하는 미야자키 감독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다는 뜻이겠다.
참고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라퓨타>를 실패작으로 손꼽고 있다는 근거에 대해서는 키타쿠보 감독은 “미야자키 감독이 직접 실패였다고 발언한 것을 들은 스태프가 여러 명 존재한다. 다만 팬의 심경을 고려해서 공공연하게는 발언하지 않을 뿐”이라고 말했다.
■ 창작자와 관객의 입장
문제는 실제로 <라퓨타>가 실패작인지 아닌지 하는 문제가 아니다. 작가가 본인의 작품을 어떻게 생각하든, 수용자가 그것을 신경쓸 필요는 없다는 점은 이번 트위터 논쟁에서도 많은 일본인들이 발언하고 있다. 당연히 <라퓨타>는 재미있는 작품이고, 지금까지 일본에서도 TV방송을 여러 번 하면서 매번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2011년 12월에도 일본 TV에서 방송되었는데, 작중의 클라이맥스에 해당하는 부분에서 주인공 파즈와 시타가 하는 대사 “바르스!”는 당시 트위터 상에서 1초당 2만5천개의 글이 올라오면서 세계 신기록을 세웠다. 2011년 12월 14일의 트위터 공식 발표에 따르면, 12월 9일 일본에서 TV 방영된 <라퓨타>의 방송 중에 1초당 25088건의 투고가 이루어져 당시까지의 트위터 신기록을 세웠다고 한다.
일본은 물론이고 한국에서도 <라퓨타>는 1980년대부터 일본 애니메이션 마니아들 사이에서 유명한 작품이었다. <미래소년 코난>이란 TV애니메이션이 국내에서도 80년대를 대표하는 인기작으로 자리잡았는데, 그 감독이었던 미야자키 하야오가 내놓은 극장용 애니메이션이라는 소개에 <라퓨타>를 접했던 이들이 <코난>을 연상케 하면서도 또 다른 스타일에 반했던 것이다. 필자 역시 1980년대에 이 작품을 처음 접하고서 일본 애니메이션의 ‘재미’를 다시금 느꼈으니만큼, 당연히 이 작품이 주는 재미를 의심하지 않는다. 물론 키타쿠보 히로유키 감독 역시 앞서 말했듯이 <라퓨타>가 재미없다는 말이 아니라고 몇 번이나 강조했기 때문에, 관객으로서 <라퓨타>를 재미있게 본다는 점에 이의를 제기한 것은 아니다. 다만 <라퓨타>가 본래 좀 더 긴 작품으로 구성될 수밖에 없었다는 설이 있는 등, 아직 오리지널 장편 극장 애니메이션을 처음 만들던 당시의 미야자키 감독으로서는 스스로 부족한 점을 느꼈을 가능성은 높다. 대부분의 창작자가 특히 본인의 초기작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기에 더더욱 그렇다. 자기반성이 없는 창작자는 발전이 없을 테니, 거장으로 평가받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라면 본인의 초기작인 <라퓨타>를 실패라고 생각하는 것 역시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겠다.
다만 이처럼 ‘고전 명작’으로 자리잡은 작품에 대해서도 크리에이터의 입장에서는 또 다른 판단을 해야할 수 있다는 점을 키타쿠보 감독은 지적하고자 했던 듯 하다. 그리고 그가 지적한 스토리상의, 설정상의 문제점은 창작자로서 충분히 지적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했다. 문제는 이러한 창작자 입장에서의 발언에 대해 대부분 관객 입장일 다수의 일본 트위터 이용자들이 반발했다는 사실이다. 물론 트위터라는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 사이트 자체가 일종의 ‘채팅’과도 같은 형식으로, 140자라는 짧은 분량으로 제한적인 발언이 가능한 공간이다 보니 키타쿠보 감독이 표현에 있어서 부족했던 면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점을 감안하더라도, 명백히 창작자의 입장에서 <라퓨타>란 작품에 이러이러한 면이 설정상 모순이고 스토리 전개에 있어서는 이러이러한 부분에서 설명 부족인 채 건너뛰었다는 지적은 비단 창작자만이 아니라 평론가이든 누구든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것이다. 하물며 이번 사건에서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 본인이 자신의 작품에 대해 그렇게 발언했다는 것임에야…. 그 부분에 대해서는 창작자, 표현자의 SNS 이용 방법에 관한 문제라든지 대중의 리터러시(literacy) 등 다양한 논의점이 존재할 수 있겠으나 본고에서는 생략하고자 한다.
■ <천공의 성 라퓨타>에 대하여
마지막으로 간단히 <라퓨타>란 작품에 대해 설명하면서 이 글을 마치겠다. <천공의 성 라퓨타>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1986년 작품으로, 원작이 없이 처음으로 원작·각본·감독을 전부 미야자키 하야오 본인이 맡은 오리지널 애니메이션이다. 프로듀서로는 타카하타 이사오(<반딧불의 묘>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 감독), 음악은 전작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에 이어 히사이시 죠가 이어서 맡았다. (히사이시 죠는 이후 최신작 <벼랑 위의 포뇨>까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 작품 전부의 음악을 맡았다. 그 외에는 한국영화 <웰컴 투 동막골>의 음악도 담당.)
참여 애니메이터를 살펴보면, 일본의 ‘스타 애니메이터’인 카나다 요시노리가 ‘원화 팀장(原畵頭)’이라는 독특한 직책명으로 참가하고 있다. (보통 일본의 다른 작품에서는 볼 수 없는 직책명을 카나다 요시노리만을 위해 따로 만든 것.) 카나다는 <나우시카>부터 <모노노케 히메>까지 스튜디오 지브리 작품에 쭉 원화로 참가했고, <무적초인 잠보트3> <무적강인 다이탄3> 등 토미노 요시유키 감독의 로봇 애니메이션에도 참가하여 주목받은 바 있다. 그 외에도 원화 애니메이터로 마에다 마히로(<청의 6호> <암굴왕> 감독), 코사카 키타로(<가지(나스): 안달루시아의 여름> 감독), 콘도 카츠야(<바다가 들린다> <코쿠리코 언덕에서> 캐릭터디자이너), 나쿠라 야스히로(<천사의 알> 작화감독, <메트로폴리스> 캐릭터디자이너·총작화감독), 나베시마 오사무(<괴도 세인트 테일>=한국 제목 <천사소녀 네티> 감독), 토모나가 카즈히데(<명탐정 홈즈>=한국 제목 <명탐정 번개> <루팡 3세 후마 일족의 음모>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 작화감독) 등, 일본 애니메이션계의 쟁쟁한 인물들이 이름을 올리고 있다. <라퓨타>는 그 내용은 물론이고 제작 스태프 측면에서도 일본 애니메이션계에 중요한 역할을 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