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테마연재]죽음이 주는 기회

그린 나이트, 2021

[테마연재]죽음이 주는 기회 대표 이미지

* 본 영화글은 한국영상자료원 강좌 <‘영화+글’ 시리즈 3: 영화 비평 쓰기> 과제 선정작입니다.

녹색 기사가 자신의 머리를 들고 사라지자 새로운 영웅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한 크리스마스 연회가 계속된다. 가엾은 가웨인(데브 파텔)을 두고 약속한 1년의 세월이 속절없이 흐르고, 이제 그는 자신의 목을 바치기 위한 모험을 떠나야 한다. 그런 가웨인을 향한 마을 사람들의 관심은 무척이나 지대해 그의 미래를 예견하는 인형극까지 만들어질 정도이다. 서로의 목을 번갈아 내려치는 가웨인과 녹색 기사, 즉 지나간 크리스마스와 다가올 크리스마스의 간극을 원판의 그림 배경이 빙글빙글 돌아가며 담아낸다. 이 조악하게 꾸며진 시간의 흐름과 인형극에 열중한 마을 사람들의 정적인 리액션 숏이 교차한다. 배경을 교체해 끼우지 않고 그것을 이어서 회전시키는 것. 운동과 부동성의 아이러니한 공존. 서막의 짧은 시퀀스는 <그린 나이트>가 보여줄 강렬한 장면의 예고처럼 느껴진다.

그 장면을 말하기 위해서는 조금 앞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시체로 뒤덮인 황무지에서 홀연히 나타난 소년(배리 케오간)이 가웨인의 등 뒤로 수수께끼 같은 말을 던진다. “앞으로 더 어려워질 것”이라고. 소년의 정체는 곧바로 드러난다. 그가 이끄는 강도 무리는 가웨인의 말, 허리띠, 도끼를 강탈하고, 가웨인은 꽁꽁 묶여 비참한 꼴로 숲에 버려진다. 그런데 잠자코 가웨인을 응시하던 카메라가 그를 버리고 시계방향으로 회전하기 시작한다. 프레임은 자연의 소리와 함께 계절에 따라 변하는 숲의 풍경을 담는다. 이윽고 원점으로 돌아오자 유골이 된 가웨인이 그 자리에 남아 있다. 그런데 카메라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반대 방향으로 되돌아가기 시작한다. 녹음이 우거졌던 숲이 서서히 낙엽이 깔린 익숙한 풍경으로 돌아오고, 다행히 살과 가죽이 붙은 가웨인이 정신을 차려 탈출한다.

누군가는 가웨인이 사실 이 장면에서 죽었으며, 이어지는 모든 내용이 그의 사후세계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그러나 만약 그렇다면 중년의 가웨인이 목이 잘려 명백한 죽음을 맞게 되는 순간은 설명하기 어려워진다. 또 다른 이들은 이 야심찬 카메라 움직임이 가웨인을 각성시키기 위한 최악의 미래에 대한 상상이라고 설명한다. 그런데 정말 그것뿐인가. 그렇다면 감독은 단순히 경우의 수를 보여주기 위해, 심지어는 기껏 움직였다가 다시 돌아오는 (+)(-) 360°, 즉 0의 결과를 감수하며 약 2분의 시간을 정적인 자연을 담아내는 모험을 한 셈이다. 무엇보다 이 카메라 움직임을 단순한 환상의 시간으로 스쳐 보낼 수 없었다. 나를 사로잡은 원점으로 돌아오는 무위의 운동, 이 장면을 다소 도전적으로 읽어내기로 마음을 먹었다. 카메라가 죽음의 시간을 거슬러 가웨인을 살려내는 행위,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면. 부활이 아닌가.

죽었던 가웨인을 다시 살려내는 기적이 영화에서 이 순간 한 번뿐인 것은 아니다. 녹색 성당에서 도망친 이후 ‘집으로의 여정’ 파트가 시작되자 모든 등장인물이 목소리를 잃는다. 비장한 사운드트랙이 흩어진 시간의 파편을 하나로 엮어낸다. 그 안에서 가웨인은 첫 아이를 얻고, 전쟁으로 그를 잃고, 새로운 여인과 결혼하기도 한다. 그의 왕국이 멸망을 목전에 두고, 홀 안으로 적들이 쳐들어오는 절체절명의 순간. 바로 그 카메라 움직임이 반복된다. 왕좌에 앉은 가웨인을 두고 카메라가 반시계 방향으로 돌기 시작한다. 철문을 부수는 적들이 보이고, 가웨인 곁을 지키던 가신들이 하나둘씩 떠나간다. 원점으로 돌아왔을 때, 홀로 남은 가웨인이 자신을 지켜주던 허리띠를 뽑아내자 그의 목은 무형의 무언가에 의해 날카롭게 잘려 나간다. 멀쩡히 붙어있던 머리가 갑자기 떨어질 때 느껴지는 당황스러움, 나는 그것을 이미 겪어보았다. 이 시점에 영화는 돌연 가웨인을 녹색 기사와 조우한 성당으로 옮겨 놓는다. 가웨인의 목은 굳건하게 붙어있고, 말을 하기 시작한다. 그는 되살아난다.

그런데 이 시퀀스에는 앞선 숲속의 장면과 대응하기 위한 움직임 하나가 결여되어 있다. 카메라가 반시계 방향으로 돌기 전, 죽어가는 가웨인을 방치해두고 자연을 담아내던 순방향의 움직임이다. 살이 다 썩어 유골로 변하기까지 아주 긴 시간을 압축한 그 운동. 여기에 녹색 성당에서 빠져나온 이후 가웨인의 삶, 늘어진 시간의 목을 끊어 잇는 장면들이 겹쳐지자 비로소 두 운동의 조응관계가 완성된다. 이 일련의 장면들은 앞선 화면과 달리 모두 모서리가 어둡게 비네팅되어 있어 현실감각을 떨어트리는 동시에 그 장면들을 자연스럽게 연결시킨다. 결국 가웨인이 녹색 성당에서 빠져나와 왕좌에서의 최후를 맞이하기 전까지의 시간은 죽음을 향해가는 운동과 다름없다. 카메라가 회전하기 직전 왕좌에 앉아 침묵하는 가웨인이 유골만 남은 그의 모습과 겹쳐진다. 그렇다면 카메라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을 때 유골 상태였던 가웨인이 되살아나 바닥에서 꿈틀거리던 그때처럼, 그는 목이 바닥으로 떨어진 직후에 곧바로 부활할 수밖에 없다.
 

가웨인은 이 왕복운동을 하는 동안은 주인공 자리를 박탈당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영화는 처음에는 아예 그를 프레임에 담지 않는 방식으로, 두 번째에는 인물의 목소리를 빼앗아 시간의 노예로 끌고 다니는 방식으로 그의 주체성을 앗아간다. 그리하여 이제 이 운동의 주인은 시간 그 자체가 되어버린다. 그런데 의지를 가지고 카메라를 조종하는 이 시간은 가웨인을 되살려내면서까지 명백하게 그에게 무언가를 요구하는 듯하다. 무엇을 해야 그 기대를 충족시킬 수 있는가? 가웨인은 시곗바늘이 원점으로 돌아올 때마다 결단을 내려야 했다. 그는 손목을 결박한 줄을 끊어내 숲을 탈출해야 했고, 기사의 덕목을 해치는 마법의 허리띠를 빼내야 했다. 결국 이런 영웅적 결단이 가웨인을 죽음으로부터 부활시키며, 그가 결심하기 전까지는 그를 거대한 시간의 흐름에 가둬두는 수밖에 없다.

정작 가웨인은 자신이 시간의 흐름에 갇혔다거나 부활했다는 사실도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이제 영화에서 가웨인의 부활이 주는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은 오롯이 그것을 지켜보는 관객의 몫으로 돌아간다. 카메라가 느릿하게 회전하는 동안 참아왔던 숨이 충격적인 죽음과 부활의 순간을 목도한 후 확 터져 나오는 그 순간. 무엇이 그의 부활을 종용했으며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는지 파고드는 일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다시 주어진 삶의 기회를 어떤 방식으로 이어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이다. 생명을 가진 존재라면 피해갈 수 없는 과정인 죽음이, 영화에서는 패배나 종말이 아닌 새로운 도약과 기회로 그려진다. 되살아난 그는 여정의 끝에 자신의 죽음이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기고, 도끼에 머리가 잘려 나갈 것을 알면서도 허리띠를 빼낸다. 영화가 초월적인 힘을 빌려오면서까지 가웨인을 되살렸던 이유를 바로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그린 나이트>는 선고된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순간 오히려 생생해지는 가웨인의 얼굴을 통해, 한 인간이 두려움을 털어내고 죽음과 맞서나가는 과정을 그린다.

버틸락 성의 귀부인이 가웨인의 초상화를 그려준다며 커튼을 치기 시작한다. 이미 초상화가 있다는 연약한 거부에도 불구하고 그는 어두운 공간에 갇히고 만다. 19세기에 발명된 사진술, 니엡스의 헬리오그래프가 14세기 영국의 서사시를 재현한 영화에서 이루어진다. 이 사진은 영화의 마지막 왕궁 홀의 벽면에 걸려 있다. 그림은 화가의 주관에 따라 이리저리 변형되며 상상 속 존재들도 얼마든지 캔버스 안에 재현될 수 있다. 반면 사진은 피사체의 실존을 ‘그 자체로’ 증명해주는 절대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이 힘이 최후의 순간 그 자리에 초상화가 아닌 사진이 걸려 있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가웨인이 이 세계 내에 존재했음을 명백하게 증명하는 사진 앞에서, 그는 비로소 유한한 운명에 반항하듯 자신의 죽음을 마주 본다.

관련 영화인

불러오는 중입니다.

관련 영화글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