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연재
[테마연재]멍든 시간의 노래
피닉스, 2014
* 본 영화글은 한국영상자료원 강좌 <‘영화+글’ 시리즈 3: 영화 비평 쓰기> 과제 선정작입니다.
<피닉스>는 한 쌍의 커다란 눈에서 출발한다.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넬리(니나 호스)는 다친 얼굴에 붕대를 칭칭 감고 돌아온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그녀의 커다랗고 퀭한 눈뿐이다. 차를 타고 베를린에 돌아갈 때나 얼굴에 성형수술을 받기 위해 병원을 찾았을 때 넬리의 눈은 끊임없이 두리번거린다. 그 눈은 바라볼 곳을 찾지 못해서 섬뜩한 느낌을 준다.
넬리는 곧 바라볼 대상을 찾아낸다. ‘피닉스’ 클럽에서 일하는 남편 조니(로날드 제르펠드)를 찾아낸 후로 그녀의 시선은 조니만을 향한다. 한 군인이 그녀에게 담배를 권하고 몸을 만질 때에도 넬리는 아랑곳없이 조니만 보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만을 바라보고 다른 모든 것은 삭제하는 눈. 넬리의 눈은 그녀의 사랑이 맹목적이라는 느낌을 준다. 사랑은 끈질기지만 그것을 떠받치는 근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친구 레네(니나 쿤젠도르프)와 여관 주인의 말은 조니가 넬리를 배신했다는 가능성을 제기하지만 넬리는 믿지 않는다. 그녀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 무엇을 보고 있는가?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다. 넬리의 눈은 죽은 자의 눈이다. 조니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이름을 물어보았을 때 넬리는 ‘에스더’라고 답한다. ‘에스더’는 전쟁 전에 넬리와 찍은 사진이 남아 있는 유대인 친구로 레네가 뒤적이는 사망자 목록에 올라 있다. 넬리는 스스로 죽은 자의 이름을 붙이고 망자의 시간을 산다.
조니 또한 이상한 시간대에서 살고 있다. 넬리는 예전처럼 남편을 조니라고 부르고 싶어 하지만 그는 그것을 고집스럽게 거부한다. 그의 이름이 조니였던 과거는 그의 발목을 잡고 현재를 살지 못하게 만든다. ‘요하네스’라는 딱딱한 이름 아래 자신을 닫아건 조니는 그의 집에 있는 잠긴 서랍을 닮았다. 그 서랍은 넬리에 관한 물건들을 담고 있는데 조니가 허락할 때만 열린다. 넬리가 서랍을 열려고 하자 조니는 화를 낸다. 한밤중에 넬리를 깨우더니 서랍에는 돈이 없다며 그녀를 도둑으로 몰아세운다. 넬리가 빨간 드레스를 입고 머리를 염색한 채 자신이 넬리임을 증명하려 드는 장면에서도 조니는 수상하게 행동한다. 그는 잠깐 과거를 본 듯 넋을 잃지만 곧 넬리에게 걸음걸이가 이상하다고 핀잔을 준다. 과거에 대한 조니의 거부는 넬리의 사랑만큼 끈질기고 수상하다.
넬리가 조니에게 수용소에서 겪은 일, 수감자들이 “기둥에 둘러섰던 방식”을 단 한 번 말하는 장면이 있다. 넬리는 읽은 이야기라고 얼버무리지만 조니의 얼굴은 대번에 일그러지고 그의 눈은 다른 곳을 향한다. 그는 수용소와 죽음에 관한 이야기가 싫다. 그 이야기는 그가 대면하지 못하는, 부인을 죽음으로 보낸 과거와 연결되어 있다. 수용소에서 돌아온 넬리는 조니가 직감적으로 맡을 수 있는 죽음의 냄새를 풍겼을 것이다. 조니는 넬리가 살아돌아온 부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그녀는 그에게 과거를 상기시킨다. 그때마다 조니는 열심히 도망간다.
조니와 넬리는 각자의 이상한 시간대에 자리잡고 연극을 시작한다. 그들이 함께했던 시간은 한 조각씩 되돌아온다. 넬리가 좋아했던 여배우, 함께하던 산책, 자주 찾던 공원의 둥근 벤치. 과거의 조각들은 그러나 믿을 만한 하나의 그림으로 모이지 못한다. 과거를 보여주지 못하고 넬리의 사랑을 신빙성 있게 만들지 못하며 무엇보다 현재를 구성하는 데 실패한다.
조니와 넬리의 연극이 어딘지 의심스러운 이유는 그들 사이에 깊은 골이 패여있기 때문이다. 그 골은 시대가 남긴 균열이고 두 개인 사이의 시차이다. 둘이 함께했던 시간과 현재 사이에 넬리 혼자 수용소에 간 시간이 있다. 심연과도 같이 무시무시한 입을 벌리고 그 시간은 둘 사이에 누워있다.
조니를 보지 않으면 넬리는 수용소에서 지낸 시간을 보아야 한다. 그것은 넬리와 수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혔다. 예를 들어 레네는 넬리에게 짧은 편지를 남기고 자살한다. 죽은 자 ‘에스더’로 살기를 포기한다면 넬리는 그 상처를 오롯이 안고 걸어가야 할 것이다. 그녀는 그것을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한다. 넬리의 눈은 그래서 조니를 찾아내기 전에 세상을 불안하게 떠돌았던 것이다.
영화는 그런 넬리를 기다린다. 그 기다림은 넬리와 레네가 차를 타고 베를린에 돌아오는 첫 장면에서 이미 드러난다. 카메라는 넬리의 다친 얼굴 대신 그녀를 바라보는 군인의 얼굴을 비춘다. 그의 놀란 표정에서 우리는 넬리가 심하게 상처입었다는 것을 수 있다. 영화는 우리에게 상처를 직접 보여주지 않듯이 넬리에게 얼른 상처를 마주하라고 재촉하지 않는다. 그녀에게 과거를 똑바로 보고 현재를 살라고 명령하지 않는다. 대신 넬리를 거짓 안에 잠시 머물게 한다. 조니가 쓴 연극 안에 살게 두는 것이다.
연극을 할수록 넬리와 조니 사이에 파인 골은 더 깊게 벌어진다. ‘살아 돌아오겠다’는 넬리의 편지가 등장하는 장면에서 둘 사이는 눈에 띄게 어색해진다. 넬리가 “누군가는 (수용소에 대해) 물어볼 것”이라고 말할 때 그 ‘누군가’는 조니일 것이다. 넬리는 그가 수용소에 대해 물어보기를 바란다. 조니에게 실망할수록 넬리는 과거와 진실에 가까이 다가간다. 여관 주인과의 대화에서 조니가 그녀를 밀고했다는 가능성이 등장한 후 넬리는 나치에게 붙잡혔던 배로 간다. 그녀는 마치 뱀이 들어있는 상자를 여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문을 연다. 그 문과 함께 냉혹한 과거가 끼익 하고 열린다. 넬리는 힘겹게 과거와 마주보고 있다.

넬리와 조니 사이에 벌어진 시간의 골이 처음 터져 나오는 것은 조니가 넬리의 팔에 새겨진 수감자 번호를 건드리려 할 때다. 넬리는 조니에게 처음으로 저항한다. 그녀는 죽음의 시간으로서의 과거를 온몸으로 겪었다. 넬리를 후벼판 과거는 흉터가 되고 그녀의 살이 되었다. 수감자 번호를 건드리는 것은 과거를 지우면서 현재를 부정하는 일이다. 넬리의 살아있는 살과 육체, 즉 생生을 부정하는 일이다. 조니의 구상과 달리, 생은 아우슈비츠에서 겪은 죽음을 부정하면서 돌아오지 않는다. 붉은 드레스를 입고 구두를 신은 채 춤추듯이 살아돌아오지 않는다.
생은 넬리에게 기차 소리로 온다. 연극 속에서 기차역은 넬리가 생존자로 귀환하는 세레모니의 배경이다. 기차가 달려올 때 넬리는 깨어난다. 죽은 레네의 편지를 읽는 장면에서 기차 소리는 처음 들린다. 넬리가 알 수 없는 표정을 띈 창백한 얼굴을 들었을 때 거대한 검은 기차가 연기를 뿜으며 지나간다. 그녀가 이혼 서류를 읽는 장면에서도 기차 소리가 등장한다. 조니가 ‘이혼을 통보한다’는 문장이 기차처럼 숨막히게 달려오고 초시계 소리가 더해진다. 넬리가 새로운 날을 맞을 때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처럼.
넬리는 홀로 두 번 기차를 맞이하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하다. 새로 태어나기 위해 넬리는 노래해야 한다. 그녀는 전쟁 전에 가수였지만 선뜻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 조니 앞에서 노래를 부른다면 자신이 그의 부인이라는 사실을 손쉽게 증명할 수 있을 것인데 그러지 않는다. 그것은 영화가 노래에 엄청난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넬리와 레네가 함께 밥을 먹는 장면에서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이 듣는 ‘Speak Low’는 영어로 된 노래이다. 레네는 독일 노래는 듣지도 부르지도 못하겠다고 말한다. 독일어로 말하면서 노래는 안 된다니. ‘노래’는 말과 다르다. 노래는 고통과 복수심을 잊게 하므로 레네는 그것을 경계한다. 한편 노래는 상처받은 자가 진실을 담을 수 있는 유일한 언어이다. 노래를 불러 달라는 레네의 부탁에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일 때 넬리는 아직 준비가 덜 된 것이다.
다시 태어날 준비가 되었을 때 넬리는 비로소 노래한다. 노래는 섬광처럼 와서 넬리의 과거부터 현재까지 온 존재를 꿰뚫고 흔들어놓는다. 그것은 파열음이다. 한 여성의 인생에 돌아킬 수 없는 금이 그어지는 소리. 시대의 야만에 균열이 가는 소리. 노래는 폭탄보다 강력하고 수용소의 숫자보다 선명하면서 동시에 아름답다.
그것을 듣고 조니는 한 대 맞은 것처럼 멍하니 앉아있다. 넬리는 더이상 그의 반주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연극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조니를 한 번 슥 쳐다보고 넬리는 나가 버린다. 가버린 넬리와 앉아 있는 조니. 일그러진 세계를 부수고 나간 자와 그러지 못한 자. 또각또각 발소리가 들려온다; 그것은 현재로 걸어나가는 자의 소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