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국영화사100년]일본영화와 할리우드영화 사이, 한국식 장르영화

[한국영화사100년]일본영화와 할리우드영화 사이, 한국식 장르영화 대표 이미지

1950년대 초중반 한국영화계

해방 이후 한국영화 제작 편수는 1948년부터 20편을 넘기는 등 점차 제작 환경이 안정되었고, 영화인들은 ‘한국’ 영화를 찾아가는 데 열중했다. 하지만 1950년 발발한 한국전쟁으로 영화산업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게 된다. 민족상잔의 비극 앞에서 영화까지 만들 여유는 없었고, 촬영 현장에 있던 영화인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이들은 1·4 후퇴 이후 진해, 대구, 부산 등 후방 도시의 군과 관으로 다시 모여 뉴스영화나 기록영화 제작에 참가하며 종군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사실 1951년 3월 시점에 38도선 부근에서 전선이 교착되어, 그해 7월부터는 본격적인 휴전 회담이 착수되었다. 1953년 7월 휴전 협정이 타결될 때까지 피란 도시의 영화인들은 다시 극영화를 만들기도 했는데 신상옥의 데뷔작 <악야>(1952), 민경식의 데뷔작 <태양의 거리>(1952) 같은 작품들이 리얼리즘 화법으로 전시의 공기를 담아냈다. 열악한 환경에서 이런 무모한 시도가 전후 한국영화계가 곧바로 가동될 수 있는 기반이 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1954년 ‘국산영화 입장세 면세조치’라는 정책적 호재까지 더해졌고, 이규환의 <춘향전>(1955)에 2개월 장기 흥행이라는 열기로 관객들이 화답하면서, 한국영화는 다시 궤도에 올라선다. 1954년 18편, 1955년 15편 그리고 1956, 1957년은 매해 30편 이상의 제작 편수를 기록하게 되는데, 전후부터 1950년대 후반까지의 시기를 한국영화 성장기로 일컫는 이유일 것이다.

‘조선’ 영화에서 ‘한국’ 영화로, 한형모의 역할

일제 말기에서 한국전쟁 시기를 거쳐 1950년대 중반 한국영화의 도약으로 이어지는 흐름에서 주목할 이는 바로 한형모다. 그는 1941년경 일본 도호(東寶) 영화에 입사해 촬영 기술을 배운 후, 일본에서 실시한 기능 시험에 합격해 정식 촬영기사가 되었고, 일제 말기부터 해방 이후까지 주로 최인규 감독의 영화에서 촬영기사로 활동했다. 감독 데뷔는 1949년 여순사건을 배경으로 한 <성벽을 뚫고>에서다. 그는 1950년 5월 다시 연출에 도전한 해군 홍보영화 <사나이의 길>을 촬영하다 전쟁 발발로 멈춘 후, 국방부 정훈국 촬영대로 들어가 <정의의 진격>(1951~1952) 1·2부를 완성하는 등 종군 활동을 하다 휴전을 맞았다. 한형모는 조선영화에서 한국영화로 이행하는 바로 그 시기의 인물인 것이다.

1954년 6월 한형모는 윤인자, 이향 단 2명의 주연배우 위주로 경제적으로 촬영한 <운명의 손>에 착수한다. 이 영화는 반공으로 포장한 남북분단이라는 주제, 북한의 스파이인 여성과 남한의 특무장교인 남성이 서로의 신분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으로 펼쳐지는 스릴러의 분위기, 그리고 둘의 사랑과 이별이 빚어내는 멜로드라마 정서를 키워드 삼아, 그해 10월 촬영을 마무리하고 12월 개봉하게 된다. <운명의 손>의 스토리를 보면 혹시 떠오르는 영화가 있지 않은가. 바로 1999년 개봉한 <쉬리>(강제규)의 원조 격으로 이 영화를 언급하는 이유다.

영화 스타일적 혼종성

한형모가 일제 말기부터 1950년대 대중영화 최전선에서 활동했다는 사실은, 그의 영화에 일본영화의 화법과 할리우드영화의 스타일이 모두 공존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일제 시기 일본에서 영화를 배웠던 조선인 감독들이 그랬듯, 그 역시 일본영화의 문법과 유사한 조선영화식 화법으로 식민지 조선인 관객들을 공감시켰고, 해방 이후에는 이를 기반으로 하되 남한으로 급격히 밀려들어온 할리우드영화의 화려한 스타일을 염두에 두게 된다.

<운명의 손>에서 확인되는 대표적인 일제 시기 화법은, 영화 초반 마가렛의 방 장면에서 사용되는 인형 인서트 쇼트일 것이다. 인형이 무언가 알고 있다는 의미와 시간 경과를 동시에 노리는 쇼트 전략은 <미몽(죽음의 자장가)>(양주남, 1936)에서 마네킹의 인서트 쇼트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영화의 마지막을 위해 구둣발과 반지를 낀 손만 보여주며 간첩단 우두머리(주선태)의 존재를 숨기는 것은 <군용열차>(서광제, 1938)에서 구둣발 쇼트로 스파이의 존재를 숨겼다 드러내는 방식과 상당히 유사하다. 또 인물과 배경이 모두 적절하게 담기는 풀 쇼트를 선호하고, 쇼트를 나누기보다 카메라 움직임을 통해 호흡을 길게 가져가는 방식으로 관객의 감정이입을 유도하는 것도 그렇다. 물론 이러한 스타일은 할리우드영화의 영향을 받은 일본영화와 공유한 것이자 일정 부분 조선영화에서 토착화된 부분도 있을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운명의 손>의 영화적 리듬감은 1950년대 후반보다 일제 시기의 그것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오명 Notorious>(1946)에서 힌트를 얻다

촬영기사 출신의 한형모는 1950년대 한국영화계에서, 기술 방면이라면 단연코 일인자였다. 할리우드의 스파이 스릴러 장르를 취한 <운명의 손>은 상업적인 흥행에는 비록 실패했지만, 당시 젊은 영화인들이 연출 기법의 교과서로 삼았을 정도로, 기재 운용과 스타일적 시도를 모두 포함한 의미의 기술적 수준에서 당대 일반을 뛰어넘는 작품이었다. 이후 세대인 김기덕 감독이 증언하듯이, 특히 한형모 감독의 조명 설계는 당시 한국영화 수준을 훌쩍 넘어서는 것이었다. 인물의 얼굴을 잘 보여주는 것에 급급하거나, 하이키(high key)로 인물의 얼굴을 무조건 밝게만 보이게 하는 조명 방식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 영화의 대화 장면에서, 마가렛의 얼굴을 반이나 가리는 그림자는 당대 한국영화에서는 새로운 도전이었다. 한형모는 두 인물의 비극적인 운명과 긴장감 어린 분위기를 조명으로 표현하며, 스릴러 장르의 미학을 적확히 소화하고 있다.

<운명의 손>에서 보이는 할리우드영화 스타일의 정점은 바로 마가렛(윤인자)과 영철(이향)의 포옹 장면이다. 알프레드 히치콕의 1946년 작품 <오명>에서 엘리시아(잉그리드 버그만)와 데블린(캐리 그란트)의 러브신을 연상시키는 이 장면은 로키(low key) 촬영으로 실루엣으로만 처리하는 세련됨을 보인다. 알프레드 히치콕의 영화 중 가장 단순한 구성으로 평가되는 <오명>을 두고 프랑수아 트뤼포가 “최소한의 요소로부터 최대한의 효과를 얻는다”고 평가한 것처럼, 이는 <운명의 손>에서 마가렛과 영철이라는 남녀 주인공으로만 극의 마지막까지 끌고 간 한형모의 연출 의도와 정확히 일치한다. 이처럼 <운명의 손>은 할리우드영화의 스타일을 의도한 흔적이 곳곳에 보이는데, 이는 당대의 흥행 코드인 신파성을 벗어나 전반적으로 감정을 절제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사실 이 영화는 <춘향전>(국도극장 개봉)과 같은 시기에 수도극장에서 개봉해 당시 관객들의 선택을 받지는 못했는데, 아마 이러한 화법이 흥행에 실패한 원인이었을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일제 시기 조선영화와 1950년대 중반 한국영화가 극명히 달라지는 지점은 후자가 관객들을 위한 화려한 볼거리(spectacle)를 앞세운 것이다. <운명의 손>에 등장하는 양공주의 아파트 공간, 양품점의 쇼윈도, 마가렛과 영철의 데이트 코스(권투경기장, 경륜장, 골프장, 바, 댄스홀) 장면처럼, 관객을 위한 볼거리 혹은 대리 체험의 장을 디제시스(diegesis, 영화적 시공간)에 심어두는 것은 한형모의 특기였다. 특히 경륜장을 포함한 데이트 장면의 몽타주 시퀀스는, <오명>의 경마장 신에서 나치 조직의 세바스찬이 엘리시아와 데블린을 쌍안경으로 지켜보는 장면을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 한형모의 차기작 <자유부인>(1956)에서 양품점, 댄스홀, 레스토랑, 호텔 같은 상류층 공간이 등장하는 것 역시 할리우드 영화(혹은 미국식 문화)의 화려한 볼거리를 이식한 장면들로, 이후 그의 영화적 특징으로 자리 잡게 된다.

1950년대 한국 대중영화의 일인자

이처럼 한형모는 멜로드라마 <자유부인>의 흥행 성공으로 확실한 입지를 구축했고, 음악영화이자 코미디인 <청춘쌍곡선>(1956), 김내성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탐정스릴러 <마인>(1957), 박계주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멜로드라마 <순애보>(1957) 이후 김영수의 희곡 「여사장 요안나」를 각색한 로맨틱코미디 <여사장> (1959)까지, 화려한 스타일과 밀도 있는 연출로 다양한 장르에 도전하며 1950년대 한국 대중영화의 격조를 높였다.

이후 한국영화는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까지 성장 가도를 달린다. 1958년 설립된 안양촬영소를 위시로 기술적 기반이 마련되었고, 1959년에는 100편의 제작 편수를 넘기며 중흥기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신파극과 멜로드라마, 코미디가 장르적 주류를 이루는 가운데 1960년대의 영화 제왕 신상옥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때다. 전후 한국 사회를 네오리얼리즘의 분위기와 속도감 있는 스펙터클을 결합해 제시한 <지옥화>(신상옥, 1958)는 그 역시 주도하기도 한 멜로드라마의 틈바구니에서 1950년대 어떤 과감함을 상징하고 있었다. 

관련 영화인

불러오는 중입니다.

관련 영화글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