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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험영화]프리 레디컬스 (렌 라이, 1958)

영토 없는 영화들을 위한 지도: 1950년대 이후 실험영화 ②

[실험영화]프리 레디컬스 (렌 라이, 1958) 대표 이미지

1980년에 출판된 미국 인명사전 「마르퀴스 후스 후 인 아메리카 Marquis Who’s Who in America」에는 렌 라이(1901-1980)가 ‘모션 컴포저(Motion Composer)’로 등재되어 있다. 직역하면 ‘동작(움직임) 작곡가’가 될 이 합성어는 드로잉, 회화, 직물염색(납염, Batik), 사진, 영화, 키네틱 조각, 시와 산문 등의 매체로 작업해왔던 라이가 본인의 작업을 ‘움직임의 형상(figure of motion)’으로 압축해서 표현했던 것을 고려하면, 그를 대표하는 단어의 조합으로서 매우 적절했다고 할 수 있다. ‘모션 컴포저’가 다양한 매체를 가로지르며 운동의 리듬을 탐구했던 라이를 대변한다면, 1958년에 첫 상영되었던 <프리 래디컬스 Free Radicals>는 그의 작업 이력 전체를 함축하고 대표하는 작품이다.

<프리 래디컬스>를 라이의 대표작으로 꼽는 이유는 관점에 따라 여러 가지로 나열할 수 있다. 프리 래디컬스는 화학용어로서 유리기라고 번역되는데, 홀전자(unpaired electron)를 갖는 원자나 분자를 의미한다. 보통의 원자나 분자에서 전자는 회전 방향이 반대인 두 개의 전자가 쌍을 이루어 안정된 상태를 유지한다. 그러나 빛이나 열과 같은 에너지가 가해져서 전자의 결합이 끊어지면 홀전자가 되고, 이는 다른 원소들과의 반응을 촉진하는 불안정한 상태를 야기한다. 라이는 전 작업을 걸쳐서 신체와 물질을 탐구했었고, 자신의 창작이론을 진화론, 신경과학, 양자역학, 유전학에서의 발견들을 통해 확인하고 설명하는 것을 좋아했다. 라이는 신체와 물질 각각 뿐만 아니라 둘 사이에서 벌어지는 교환 역시 에너지로 생각했고 안무를 에너지에 헌정된 예술로 간주했다. 그가 자주 썼던 용어로 표현하면, 인간의 ‘오래된 뇌(old brain, 이성이나 문자를 거치지 않고 직관적인 앎을 가능하게 하는 몸의 깊숙한 곳)’와 유전자(태고부터 내려오는 인간의 활동들이 각인된 저장소)는 사물의 운동(에너지)와 공감각적으로 공감(empathy)한다. 라이의 필모그래피에서 색채, 댄스, 리듬 등의 단어가 눈에 띄는 것은 운동에 대한 그의 관심을 반영한다. 그러나 <프리 래디컬스>에서는 제목이 뜻하듯, 하나의 형상이 전개되고 다른 형상으로 변주되는 과정이 화학적인 촉발과 반응처럼 구성되었고, 아프리카 바기르미족(Bagirmi)의 드럼 음악(인간의 원초적 에너지)에 맞춰 안무 되었다는 점에서 라이의 관심사가 응축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프리 레디컬스
<프리 래디컬스> 별표 시퀀스의 일부
출처: http://thethird-eye.co.uk/free-radicals-by-len-lye

<프리 래디컬스>를 라이의 대표작으로 꼽을 수 있는 또 다른 이유는 영화제작을 위한 재정적 후원을 받는 것을 포기하고 영화가 예술이라는 것을 증명하려는, 다소 결연한 의지로 만들었던 작품이기 때문이다. 라이의 영화들은 제작비의 출처에 따라 여섯 그룹으로 분류할 수 있다. (1) 런던 필름 소사이어티(the London Film Society, 1925년에 설립되어 1939년까지 지속되었던 영국 최초의 영화 협회이다. 알프레드 히치콕, 캐럴 리드와 같은 감독들도 회원이었다)로부터 제작비 일부를 충당했던 1929-34년, (2) 영국 중앙우체국(GPO, the General Post Office)의 영화과 등에서 제작비 지원을 받았던 1935-40년, (3) 영국 정보부(MOI, the Ministry of Information)의 사실주의자 영화과(Realist Film Unit)에 소속되어 나치에 대항하는 선전영화를 만들었던 1941-43년(공교롭게도 MOI는 라이의 영화를 보고 선전영화는 더 직설적이고 덜 영화적이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4) 1944년에 뉴욕으로 옮겨서 <마치 오브 타임 the March of Time> (타임 사에서 제작했던 단편 뉴스릴 영화 시리즈로 극장에서 본영화 전에 상영되었다) 시리즈의 연출가로 뉴스릴 영화를 만들었던 1944-51년, (5) 제작비 대부분을 스스로 충당했던 1952-59년, (6) 키네틱 조각을 만들다가 다시 영화로 돌아와서 그의 고국 뉴질랜드로부터 제작비를 지원받았던 1979-80년이다. (지면의 한계로 작품의 상세한 목록을 생략한다.
http://sensesofcinema.com/2002/feature-articles/lye-2/#filmo을 참고하기 바란다.)

렌 라이
1945년 경 <마치 오브 타임>의 사무실에 있는 렌 라이
사진의 왼쪽은 라이가 디자인한 시리즈의 로고 
출처: http://www.art-newzealand.com/Issue101/lye.htm

<마치 오브 타임> 시리즈의 일부를 연출했던 시기까지 라이는 경제적으로 풍요롭지는 않았지만 비교적 안정되게 영화를 만들 수 있었다. 특히 존 그리어슨이 이끌던 GPO의 영화과로부터 지원을 받게 되면서, 일 년에 두 편 정도로 작품을 만들 수 있었다. 이 시기 작품들의 장르를 엄밀히 따지자면 광고에 해당한다. 작품 제작을 지원했던 단체 혹은 회사들(예를 들면, 임페리얼 Imperial 항공사)이 원하는 메시지를 담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어슨은 작품 제작에 공적 자금을 투입하는 데 있어 필요한 최소한의 조건만을 달았을 뿐, 라이가 자유롭게 실험할 수 있도록 보장해주었다. 만약 라이의 대표작을 색채의 관점에서 꼽아야 한다면, 단연코 <컬러 박스 Colour Box>(1935)를 들 수 있다. 이 작품은 ‘거의’ 처음으로 필름 위에 직접 그림을 그리는 방식으로 제작된 영화이다. ‘거의’라는 표현을 쓰는 이유는 기록상으로 이탈리아 미래파 작가인 아르날도 지나(Arnaldo Ginna)와 브루노 코라(Bruno Corra)가 1908년 필름에 직접 그림을 그리는 착상을 했고, 1910년에 네 편의 추상영화를 만들었다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1910년대에 한스 스톨텐베르그(Hans Stoltenberg)나 앙리 스토크(Henri Storck)도 유사한 방식으로 작업했다는 기록이 있다. 라이는 필름 위에 직접 그림을 그리는 자신의 작업 방식을 ‘다이렉트(direct) 필름’이라고 불렀다. 이를 지칭하는 유사한 용어로는 ‘카메라 없는 영화(Cameraless film)’나 ‘필름 위에 그린 애니메이션(Drawn-on-film animation)’이 있고, 좀 더 폭넓게는 ‘핸드메이드 필름(Handmade film)’도 해당된다. <컬러 박스>는 영국 전역에서 수백만 명에게 보였기 때문에, 대중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첫 다이렉트 필름이라고 할 수 있다. (<컬러 박스>는 1935년 브뤼셀 국제영화제의 판타지 영화 부문에서 명예상(Medal of Honor)을 받았고, 이듬해 베니스 영화제에서 상영되었다. 이때 영화를 본 나치 관객들은 오스카 피싱거의 추상영화에 비해 형편없는 작품이라고 혹평했다. 형태가 지나치게 자유분방하고 작품에 사용된 재즈 음악이 흑인적(negroid)이라는 이유에서였다.) 1935년에 영국에서 이 작품을 본 노만 맥라렌(1936년부터 1939년까지 GPO에서 일했다)은 “여기 손으로 그린(handpainted) 영화의 개척자가 있다...그것은 마치 내게 꿈이 실현되는 것과 같았다...렌 라이는 그 방식을 능숙하고 훌륭하게 보여주었다”라고 말했었다. 라이는 이 시기에 듀페이컬러(Dufaycolor), 가스파르컬러(Gasparcolor), 테크니컬러(Technicolor)와 같은 컬러 필름들을 실험하는 데 집중했었다.

<컬러 박스>의 스틸 이미지
<컬러 박스>의 스틸 이미지
출처: https://filmcolors.org/2014/04/18/dufaycolor-films-by-len-lye
 
1951년에 라이가 <마치 오브 타임>을 그만두고, 1952년에 자신과 부인 앤(Ann)만 속했던 영화사의 이름을 다이렉트 필름으로 정했던 것은 카메라로 찍는 영화를 그만두고, 다시 손으로 그리는 영화를 만들겠다고 선언하는 것과 같았다. 어쩌면 라이는 자신의 삶에서 가장 안정되게 영화를 만들 수 있었던 환경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소망을 그의 영화사 이름에 담았을지도 모른다. 라이는 한스 리히터의 초청을 받아서 뉴욕시립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했고, 뒤이어 콜롬비아대학, 뉴욕대학에서 강의를 했다. 그러나 작품을 제작하기 위한 재정적 지원을 받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독립적으로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라이는 다이렉트 필름을 설립하고 나서 첫 영화로 <컬러 크라이 Color Cry>(1952)를 만들었다. (이때부터 라이의 영화 작품 포맷은 16mm로 바뀌었다.) 이 영화는 라이가 틈틈이 해왔던 포토그램(photogram, 필름 위에 사물 등을 올려놓고 빛에 잠깐 노출시켜서 상을 맺게 하는 방법) 작품들을 기초로 만들어졌다. 라이는 모슬린 천에 새겨진 점(dot) 패턴을 마음에 들어 했고, 포토그램 방식으로 필름 위에 점 패턴을 복사했다. 이때 라이가 품고 있던 생각은 “춤추는 원자”였다. 원자에 대한 관심은 그가 <마치 오브 타임>을 연출할 당시에 시리즈 중의 하나였던, 아인슈타인과의 인터뷰를 담은 영화를 보고 난 이후부터 커져 왔다.

라이는 다이렉트 필름의 두 번째 작품으로 <리듬 Rhythm>(1957)을 만들었다. 이 영화는 크라이슬러 자동차 공장을 찍은 푸티지들을 점프 컷으로 구성해 만든 1분 길이의 파운드푸티지 작품이다. 이 작품의 도입부와 후반부에도 점과 선의 패턴이 나온다. <리듬>은 1957년 뉴욕 아트 디렉터스 페스티벌(New York Arts Directors Festival)의 텔레비전 광고 부문에서 수상했지만, 크라이슬러사가 영화에 사용된 음악을 싫어했고 광고로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수상이 취소되었다. 1957년에 라이가 <프리 래디컬스>를 만들 전의 상황이 이러했다. 그런데 1958년 브뤼셀 엑스포와 함께 열릴 예정이었던 실험영화제 EXPRMNTL로부터 작품을 보내달라는 초청을 1957년에 받았다. (EXPRMNTL은 일명 크노케-르-주트 실험영화제이다. 이 영화제는 1958년부터 74년까지 총 다섯 번 개최되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유럽에서 활동하던 실험영화작가들이 상호 교류를 시작하면서 서로를 인식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이 영화제가 우리에게 좀 남다를 수 있는 이유는 동시대적인 의미에서 실험영화를 사용한-필자가 현재까지 확인했던바 내에서-첫 공식기록으로, 1957년 6월 23일 자 「국제실험영화제」라는 동아일보 기사가 해당 영화제의 작품 공모를 알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내용은 필자가 본 연재에서 맡은 유현목의 <손>에서, 좀 더 자세히 다룰 수도 있을 것 같다.) 라이는 초청을 받고 약 8개월간 <프리 래디컬스>에 집중했었다. 이 작품은 라이가 품어왔던 ‘춤추는 원자’의 실현이자, 블랙 리더(leader)로만 만든 첫 영화이다. 라이는 16mm 블랙 리더의 이멀전(emulsion)을 일상의 다양한 도구들을 사용해서 긁어내어 형상을 새겨 넣었다. 필름 이멀전을 벗겨내어 만드는 영화를 ‘스크래치(scratch) 필름’이라고 한다. <프리 래디컬스>는 스크래치 필름이기 때문에, 곧잘 맥라렌의 <블링키티 블랭크 Blinkity Blank>(1955)와 비교되기도 하고 이 작품에 라이가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맥라렌의 작품은 검은 배경에 색채가 강조되는 작품이고, 라이의 <프리 래디컬스>는 흑백으로 필름의 투명한 부분을 통과하는 빛이 스크린에 투사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게다가 스크래치는 라이가 이전에도 사용했던 방식으로, 영향 관계라기보다는 작업 태도를 공유하는 작가들에서 발견될 수 있는 유사성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본다. 

라이는 <프리 래디컬스>로 EXPRMNTL의 2등 상을 받았다. 대상은 폴란드의 발레리안 보르보츠크(Walerian Borowczyk)와 얀 레니차(Jan Lenica)의 <돔 Dom>(1958)에 돌아갔다. 심사위원은 만 레이, 존 그리어슨, 노만 맥라렌, 알렉산더 알렉세예프, 에드가 바레즈였다. 라이는 상금으로 5천 달러를 받았다. 이 성과에 힘입어 라이는 <프리 래디컬스>가 미국 내에서 성공적으로 배급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했다. 공식 상영된 곳은 아모스 보겔이 개최했던 ‘시네마 16’뿐이었고, 상영료로 50달러를 받은 것이 전부였다. 라이는 제작 후원을 구하고 실험적인 영화에 대한 지원을 촉구하기 위해 마지막 노력을 기울였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냈고(비서로부터 답장을 받긴 했다), 미국 해외공보처, 문화교류재단 등에도 편지를 보냈지만 성과는 없었다. 뉴욕현대미술관에 <프리 래디컬스> 프린트 가격으로 4천 달러를 제시했었지만, 역시 거절당했다.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자 라이는 1959년에 「영화는 예술인가? Is Film Art?」라는 글을 쓰고 영화작가로서 파업을 선언한 뒤 키네틱 조각으로 전향했다. 1960년대 피터 쿠벨카는 여러 차례 라이에게 회고전을 열고 싶다고 요청하였으나, 그는 자신은 키네틱 예술가라며 번번이 거절했다. 이와 같이 <프리 래디컬스>는 일련의 영화작업이 수렴되었던 마침표이자 다음 작업으로 넘어가기 위한 쉼표와 같은 작품이라는 점에서 라이의 대표적인 영화라고 할 수 있다.

<프리 래디컬스>가 라이의 작품 이력에서 더욱 흥미로운 점은 그가 1979년에 키네틱 조각에서 영화로 돌아와 다시 대면했던 작품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프리 래디컬스>는 1979년에 라이가 재편집했던 판본이다. 따라서 이 작품은 라이가 키네틱 조각을 경유하면서 받은 영향들이 반영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라이의 키네틱 조각 작품들의 제목과 작업 방식을 보면 차라리 <프리 래디컬스>가 이후의 작품들을 예비했다고 볼 수 있다. 라이가 품었던 ‘춤추는 원자’라는 생각은 그의 키네틱 조각들에서 더욱 다채롭게 전개되었다. 라이의 키네틱 조각은 최소한 32개의 작품이 만들어졌거나 고안되었다. 이 작품들의 목록은 새로 발굴되는 자료가 추가되면서 지금도 확장되고 있는데, 그중에 작품들의 제목을 일부 나열하면 <원자적 춤 Atomic Dance> <벨 막대기 Bell Wand> <춤추는 원자 Dancing Atom>, <뒤집기와 두 개의 회오리 Flip and Two Twisters(일명 삼부작 Trilogy)> <우주 Universe(일명 루프 Loop)> 등이다. 라이는 이 개별 작품들을 주인공으로 삼아 한데 모아놓고 라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일부에서 번개의 신으로 숭배되었던 샹고(Shango)의 신전을 만들려고 했다. 라이는 개별 조각 작품들의 복제품을 만들었을 때, 같은 스케일로 제작한 적이 없고 늘 변주를 만들어냈다. 그래서 제목도 하나 이상인 경우가 많다.
라이는 키네틱 조각을 만들 때, 그가 낙서(doodling)라고 부는 행위에서부터 출발했다. 낙서는 재료를 만지고 흔들거나 휘어보면서, 재료에서부터 파생되는 운동(에너지)의 형상을 몸으로 느껴보는 행위를 의미했다. 낙서는 그가 영화를 만들었을 때에도 작업 방식을 설명하는 핵심어였다. 라이는 조그만 필름 표면 위에 일상의 다양한 도구들로 그리거나 긁어내기 위해, 몸을 웅크리고 재료를 느끼며 형상을 낙서해나갔다. 낙서는 초현실주의의 자유연상과 유사한 방법인데, 라이가 뉴질랜드에서 런던으로 이주했던 직후 초현실주의자들과 교류했던 영향이 반영된 개념이기도 하다. 그러나 라이는 초현실주의가 지나치게 문자적이고 상징적이라고 비판했고 언제나 몸을 중심에 놓고자 했다. 이러한 측면에서 라이의 낙서는 추상표현주의자들이 그리는 행위를 강조했던 것과 유사한 맥락에 있다. 라이가 주로 사용했던 재료는 금속으로, 가늘고 긴 조각(strip), 막대, 판(sheet), 롤(roll) 등의 기본 형태들을 선호했다. 이러한 형태들은 필름 재료로도 가능하기 때문에, 키네틱 조각에서도 필름의 물성 자체에 대한 라이의 관심이 연장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라이는 금속 재료로 기본 형태를 만든 뒤에 모터나 전자석을 붙여서 움직이게 만들었는데, 이 과정을 애니메이션이라고 불렀다. 또한 그의 키네틱 작품들은 지속시간이 그의 영화들의 평균과 같이 4분에서 5분 정도였다. 라이는 재료에 열처리를 하거나 표면을 사포로 긁어내서 질감에 변형을 주고, 이에 따라 반사되는 빛의 차이들을 실험했다. 재료의 소리도 중요했다. 라이는 키넥틱 조각품에서 나는 소리들을 따로 녹음에서 사운드트랙으로 만들기도 했다. (이 사운드트랙은 아이튠즈에서 판매 중이다.) 그는 키네틱 작품을 전시할 때, 각각의 작품들에서 반사되는 빛과 소리가 대위(counterpoint)를 이루도록 배치했다. 이러한 작업 방식들은 아래에 삽입한 두 편의 다큐멘터리에 잘 드러나 있다. 
라이는 <프리 래디컬스>를 재편집한 이후 <공간 속의 소립자들 Particles in Space>(1979)을 만들었다. 평자들에 따라서 후자를 더 중요한 작품으로 간주하기도 하는데, 스탠 브래키지는 특히 이 작품을 좋아했다. 물론 <프리 래디컬스>에 대해 “믿을 수 없이 엄청난 걸작”이라는 평가도 빼놓지 않았다. <공간 속의 소립자들>에서 사용된 소리는 라이의 키네틱 조각에서 나는 소리들이 녹음된 것이다. <프리 래디컬스>와 <공간 속의 소립자들> 사이에 라이의 키네틱 조각을 놓으면 이를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가 떠오른다. 스케일이다. 개인적으로 <프리 래디컬스>를 라이의 대표작으로 꼽는 이유를 물어본다면, 그 답을 스케일에 대한 경이로운 이해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라이는 소립자의 운동과 태양의 운동은 에너지란 측면에서 같고, 서로 통한다고 생각했다. 이를 영화로 번역하면 16mm의 작은 표면 위에 새겨진 미세한 운동은 영사기를 통해 투사되는 이미지의 운동과 에너지라는 측면에서 같다. 다만 필름이 스크린에 투사되어 확장되었을 때, 필름 표면 위의 미세한 운동은 어마어마한 에너지로 증폭되고, 기념비적인 스케일의 움직이는 조각이 된다. 조각은 삼차원이고 영화 스크린은 평면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지만 라이가 필름 위에 몸으로 새긴, 그래서 발생할 수밖에 없는 힘의 차이는 필름 이멀전의 두께를 다르게 만들고, 이는 스크린 상에서 깊이의 환영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작업 방식은 머리로 계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스케일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에너지를 몸으로 반복해서 느껴야만 터득될 수 있다. 영화의 초창기, 그토록 많은 조형 예술가들이 영화에 매료되었던 것은 기념비적인 조각을 구현할 때 직면해야 하는 수많은 현실적 장애들을 영화를 통해 극복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매혹되었기 때문이다.

이토록 매혹적이고 경이로운 경험은 오늘날 컴퓨터로 영화를 만들고 보던 학생이 영화제의 상영작으로 꼽혀 처음으로 자신의 영화를 극장에서 보았을 때 느끼는 당혹감이 되어버렸다. 대부분 이 당혹감을 자신의 미숙함을 탓하며 부끄러움 속에 감추어버리지만, 사실 이러한 스케일의 차이는 탐구되어야 하는 영역에 속한다. <프리 래디컬스>를 볼 때에는 가능한 작은 스크린을 통해서 먼저 본 이후(만약 스마트폰에서 본다면 가급적 세로로), 최대한 큰 스크린으로 다시 보기를 권하고 싶다. 

※ 이 글에서 언급된 영화들과 렌 라이에 관한 사실들은 로저 호록스(Roger Horrocks)가 2001년에 펴낸 「렌 라이: 자서전 Len Lye: A Biography」과 2010년에 출간한 「움직이는 예술: 렌 라이의 작품 Art that Moves: The Work of Len Lye」을 참고하여 정리한 것이다. 렌 라이에 관한 문헌 목록은 http://sensesofcinema.com/2007/great-directors/lye/#film에 잘 정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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