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연재
[테마연재]<어느 가족>, 고레에다 히로카즈라는 사전 속 가족의 의미
영화 글쓰기 키트
본 게재글은, 17-19세 청소년을 대상으로 진행한 한국영화박물관 교육 프로그램 ‘청소년을 위한 영화 글쓰기 키트’의 최종 과제입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영화 자서전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의 서문에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영화에 관해서는 망설임이 더했고 지금도 그렇다. 이는 남에게 지적받을 것도 없이 바로 나 스스로 순수한 영화인이 아니라는 자각이 있기 때문이다.” TV 프로그램의 AD와 다큐멘터리 연출자의 시절을 거친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본인의 영화 언어가 텔레비전 방언이 밴 변칙적인 언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이유에서 그는 스스로를 ‘순수한’ 영화인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2018년 5월, 그는 <어느 가족>(2018)으로 제 71회 칸 국제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다. 최고의 권위를 가진 영화제에서 전 세계의 영화인들에게 가족 영화의 대가임을 인정받은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영화 언어의 순도가 아닌 세상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 그가 전하는 밀도 높은 감정일 것이다.
이별 후 새로운 가족을 맞이하는 이야기(<환상의 빛>), 뒤바뀐 가족에 대한 이야기(<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어머니가 다른 가족의 이야기(<바닷마을 다이어리>), 헤어진 가족의 이야기(<태풍이 지나가고>) 등 줄곧 다양한 형태의 가족을 영화 속에 담아낸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어느 가족>에서도 다시 한번 가족의 의미를 재정의한다.
도둑질과 납치
<어느 가족>의 원제는 '만비키 가족'으로, 해석하면 '좀도둑 가족'이라는 뜻이다. 가르칠 것이 도둑질밖에 없다는 오사무(릴리 프랭키)와 세탁 업체에서 일하며 주머니 속 물품들을 빼돌리는 노부요(안도 사쿠라) 부부는 성매매 업소에서 여동생의 이름으로 돈을 버는 가출 청소년 아키(마츠오카 마유), 열 살 정도 되어 보이지만 초등학교에 다니지 않는 쇼타(죠 카이리), 죽은 남편 덕분에 연금을 받는 할머니 하츠에(키키 키린)와 함께 살아간다. 피가 섞이지는 않았지만 좁은 집에 옹기종기 모여 사는 이 ‘가족’은 하츠에의 연금과 상습적인 도둑질로 생계를 이어간다.
쇼타는 문득 노부요에게 질문을 던진다. “물건 훔치는 건 나쁜 일이야?” 잠시 고민하던 노부요는 쇼타에게 되묻는다. “아빠(오사무)는 뭐라고 했어?” 쇼타는 답한다. “가게에 진열된 물건은 아직 누구의 것도 아니래.” 한편, 시간이 흘러 취조를 당하는 노부요는 하츠에를 땅에 묻은 사실에 대해 이런 말을 한다. “버린 게 아니라 주운 겁니다. 누군가가 버린 걸 주웠습니다. 버린 사람은 따로 있는 거 아닙니까?” 어쩌면 정말 좀도둑 가족은 남의 것을 훔치는 것이 아니라 주인 없는 것을 가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부모님의 다툼을 피해 밖으로 나와 있던 5살 유리(사사키 미유)는 방치된 아이였고, 이 가족은 그런 유리를 품었을 뿐이니 말이다. 사람에게 버림받은 이들이 뭉쳐 서로를 보듬어주는 가족이 되었다. 누구의 것도 아닌 물건을 가지고서 겨우 겨우, 그렇지만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가게가 안 망할 정도로만, 사회에 커다란 피해를 주지 않을 정도로만 살아가려 했는데 세상은 그것조차 내버려두지 않는다.
상처를 알아봐주는 존재
“팔 좀 보자꾸나. 여긴 왜 이러니?” 유리를 처음 만난 날, 하츠에는 유독 말라 있는 유리를 걱정하며 온몸에 난 상처를 살핀다. 상처에 꼼꼼하게 약을 바르는 하츠에의 행동은 애정을 표현하는 그의 방식이다. 무심해 보이던 쇼타 또한 유리의 상처를 발견한다. “그 상처 왜 났어?” “넘어졌어.” “그거 화상자국이잖아.” 쇼타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유리에게 “나한테 애써 거짓말하지 않아도 돼. 나도 비슷한 경험이 있어.”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유리의 상처는 외적인 것뿐만 아니라 이제껏 겪은 내면의 상처까지 포함하고 있을 확률이 높다. 하츠에와 쇼타의 관심 덕분에 유리는 신체의 상처와 함께 마음의 상처도 거의 회복한 것처럼 보인다.
치유 받는 입장에 처해 있던 유리는 상처를 보듬어줄 수 있는 존재로 거듭난다. 유리는 샤워하는 노부요의 팔을 보고 묻는다. “거기 왜 그랬어?” 그리고는 이내 자신의 팔을 내밀며 자신에게도 같은 위치에 상처가 있음을 보여준다. 얼굴이나 성격은 달라도 흉터의 모양이 꼭 닮은 둘은 정말이지 ‘모녀’처럼 느껴지기 시작한다. 유리가 노부요의 팔을 쓰다듬는 이 장면은 결이 비슷한 단편영화 <손님>(2011)을 떠올리게 만든다. 특히 <손님>은 한국의 고레에다 히로카즈로도 불리는 윤가은 감독의 초기작이라는 점에서 흥미를 끈다. <손님>의 주인공 자경(정연주)은 잔뜩 화가 난 채로 아빠의 불륜녀가 살고 있는 집에 찾아간다. 하지만 그곳에는 죄 없는 어린 남매만이 있을 뿐이다. 남매 중 동생인 기림(송예림)은 이마에 밴드를 붙여주는 자경의 눈썹에 흉터가 있음을 발견한다. “언니 왜 그래. 아파?” 밴드를 붙이는 자경과 눈썹의 흉터를 만지작거리는 기림은 오늘 처음 만났지만 서로의 상처를 알아보고 공감하는 사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손님>과 <어느 가족>에서 ‘상처를 알아보는’ 행위는 비슷한 의미를 지닌다.
한편 영화의 후반부, 원래의 집으로 돌아가게 된 유리는 친엄마의 상처를 발견한다. 유리가 상처를 만지자 친엄마는 “만지지 말랬잖아.”라며 짜증 섞인 말을 내뱉는다. 친엄마와 노부요의 차이는 여기에서 나타난다. 만지면 아플 정도의, 그러니까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를 가지고 있다는 것. 그래서 아이의 위로를 그 자체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 물론 아이의 상처 또한 보듬어주지 못한다는 것.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영화 자서전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의 서문에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영화에 관해서는 망설임이 더했고 지금도 그렇다. 이는 남에게 지적받을 것도 없이 바로 나 스스로 순수한 영화인이 아니라는 자각이 있기 때문이다.” TV 프로그램의 AD와 다큐멘터리 연출자의 시절을 거친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본인의 영화 언어가 텔레비전 방언이 밴 변칙적인 언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이유에서 그는 스스로를 ‘순수한’ 영화인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2018년 5월, 그는 <어느 가족>(2018)으로 제 71회 칸 국제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다. 최고의 권위를 가진 영화제에서 전 세계의 영화인들에게 가족 영화의 대가임을 인정받은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영화 언어의 순도가 아닌 세상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 그가 전하는 밀도 높은 감정일 것이다.
이별 후 새로운 가족을 맞이하는 이야기(<환상의 빛>), 뒤바뀐 가족에 대한 이야기(<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어머니가 다른 가족의 이야기(<바닷마을 다이어리>), 헤어진 가족의 이야기(<태풍이 지나가고>) 등 줄곧 다양한 형태의 가족을 영화 속에 담아낸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어느 가족>에서도 다시 한번 가족의 의미를 재정의한다.
도둑질과 납치
<어느 가족>의 원제는 '만비키 가족'으로, 해석하면 '좀도둑 가족'이라는 뜻이다. 가르칠 것이 도둑질밖에 없다는 오사무(릴리 프랭키)와 세탁 업체에서 일하며 주머니 속 물품들을 빼돌리는 노부요(안도 사쿠라) 부부는 성매매 업소에서 여동생의 이름으로 돈을 버는 가출 청소년 아키(마츠오카 마유), 열 살 정도 되어 보이지만 초등학교에 다니지 않는 쇼타(죠 카이리), 죽은 남편 덕분에 연금을 받는 할머니 하츠에(키키 키린)와 함께 살아간다. 피가 섞이지는 않았지만 좁은 집에 옹기종기 모여 사는 이 ‘가족’은 하츠에의 연금과 상습적인 도둑질로 생계를 이어간다.
쇼타는 문득 노부요에게 질문을 던진다. “물건 훔치는 건 나쁜 일이야?” 잠시 고민하던 노부요는 쇼타에게 되묻는다. “아빠(오사무)는 뭐라고 했어?” 쇼타는 답한다. “가게에 진열된 물건은 아직 누구의 것도 아니래.” 한편, 시간이 흘러 취조를 당하는 노부요는 하츠에를 땅에 묻은 사실에 대해 이런 말을 한다. “버린 게 아니라 주운 겁니다. 누군가가 버린 걸 주웠습니다. 버린 사람은 따로 있는 거 아닙니까?” 어쩌면 정말 좀도둑 가족은 남의 것을 훔치는 것이 아니라 주인 없는 것을 가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부모님의 다툼을 피해 밖으로 나와 있던 5살 유리(사사키 미유)는 방치된 아이였고, 이 가족은 그런 유리를 품었을 뿐이니 말이다. 사람에게 버림받은 이들이 뭉쳐 서로를 보듬어주는 가족이 되었다. 누구의 것도 아닌 물건을 가지고서 겨우 겨우, 그렇지만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가게가 안 망할 정도로만, 사회에 커다란 피해를 주지 않을 정도로만 살아가려 했는데 세상은 그것조차 내버려두지 않는다.
상처를 알아봐주는 존재
“팔 좀 보자꾸나. 여긴 왜 이러니?” 유리를 처음 만난 날, 하츠에는 유독 말라 있는 유리를 걱정하며 온몸에 난 상처를 살핀다. 상처에 꼼꼼하게 약을 바르는 하츠에의 행동은 애정을 표현하는 그의 방식이다. 무심해 보이던 쇼타 또한 유리의 상처를 발견한다. “그 상처 왜 났어?” “넘어졌어.” “그거 화상자국이잖아.” 쇼타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유리에게 “나한테 애써 거짓말하지 않아도 돼. 나도 비슷한 경험이 있어.”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유리의 상처는 외적인 것뿐만 아니라 이제껏 겪은 내면의 상처까지 포함하고 있을 확률이 높다. 하츠에와 쇼타의 관심 덕분에 유리는 신체의 상처와 함께 마음의 상처도 거의 회복한 것처럼 보인다.
치유 받는 입장에 처해 있던 유리는 상처를 보듬어줄 수 있는 존재로 거듭난다. 유리는 샤워하는 노부요의 팔을 보고 묻는다. “거기 왜 그랬어?” 그리고는 이내 자신의 팔을 내밀며 자신에게도 같은 위치에 상처가 있음을 보여준다. 얼굴이나 성격은 달라도 흉터의 모양이 꼭 닮은 둘은 정말이지 ‘모녀’처럼 느껴지기 시작한다. 유리가 노부요의 팔을 쓰다듬는 이 장면은 결이 비슷한 단편영화 <손님>(2011)을 떠올리게 만든다. 특히 <손님>은 한국의 고레에다 히로카즈로도 불리는 윤가은 감독의 초기작이라는 점에서 흥미를 끈다. <손님>의 주인공 자경(정연주)은 잔뜩 화가 난 채로 아빠의 불륜녀가 살고 있는 집에 찾아간다. 하지만 그곳에는 죄 없는 어린 남매만이 있을 뿐이다. 남매 중 동생인 기림(송예림)은 이마에 밴드를 붙여주는 자경의 눈썹에 흉터가 있음을 발견한다. “언니 왜 그래. 아파?” 밴드를 붙이는 자경과 눈썹의 흉터를 만지작거리는 기림은 오늘 처음 만났지만 서로의 상처를 알아보고 공감하는 사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손님>과 <어느 가족>에서 ‘상처를 알아보는’ 행위는 비슷한 의미를 지닌다.
한편 영화의 후반부, 원래의 집으로 돌아가게 된 유리는 친엄마의 상처를 발견한다. 유리가 상처를 만지자 친엄마는 “만지지 말랬잖아.”라며 짜증 섞인 말을 내뱉는다. 친엄마와 노부요의 차이는 여기에서 나타난다. 만지면 아플 정도의, 그러니까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를 가지고 있다는 것. 그래서 아이의 위로를 그 자체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 물론 아이의 상처 또한 보듬어주지 못한다는 것.

홀로서기
뿔뿔이 흩어진 가족들이 각자 다른 프레임 속에서 취조 당하는 이 영화의 후반부는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초기작 <원더풀 라이프>(1998)의 장면과도 닮아있다. 화면을 꽉 채우던 가족들은 온데간데없이, ‘혼자’가 된 사람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가족의 분리를 보여주려는 감독의 의도는 면회 씬에서도 적확하게 드러난다. 투명 유리를 사이에 두고 대화를 나누는 쇼타와 노부요는 사실상 같은 장소에 있지만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이들을 철저하게 떼어놓는다. 동그란 대화 구멍의 은색 테두리라는 또 하나의 프레임을 만들고 노부요의 얼굴을 가두어버린다.
‘집에서 공부할 수 없는 아이들이 학교에 가는 거 아닌가요?’라는 쇼타의 질문은 이제껏 쇼타의 세상이 얼마나 좁았는지 말해주고 있다. 양쪽 손끝을 맞대고 검지를 빙글빙글 돌리다가 주먹을 쥐어 얼굴에 콩. 훔친 물건을 숨기던 파란 가방 대신 책이 들어 있는 새 가방을 멘 쇼타는 이제 학교에 다닌다. 오사무 또한 “아빠는 이제 아저씨로 돌아갈게.”라고 말하며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선다.
영화 초반부의 쇼타는 유리에게 밀개떡을 사준다. 천국에 있는 유리 할머니의 존재를 알고 “그러면 이제 잊도록 해.”라고 말한다. 이제는 쇼타와 유리가 노부요와 오사무, 그리고 야키와 하츠에를 잊어야 할 차례가 되었다. 버스 창문 너머의 오사무가 사라지고 나서야 마침내 ‘아빠’라는 말을 내뱉는 쇼타, 쇼타네 가족들과 부르던 노래를 아파트 복도에서 홀로 부르는 유리. 이름을 숨기고 살아가는 이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이름이나 호칭이 아니라 서로를 향한 마음이었을 것이다. 아무래도 이 가족들은 서로가 함께였던 순간들을 쉽게 잊지 못할 듯하다.
사실 <어느 가족>을 따뜻한 영화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렇지만 마냥 슬프고 비극적인 영화로 해석하기에도 적합하지 않다. 보통이 아니라고 말하는 이 가족은 마음뿐만 아니라 돈 문제로도 얽혀있는 보통 가족이었다. 이유가 어찌 되었든 서로를 ‘선택한’ 사람들이기도 했다. 이제는 홀로 서야 할 때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비혈연 가족의 이야기가 아닌 모여 있는 가족과 흩어진 가족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