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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연재]<레이디 버드> 익숙함을 그리워하게 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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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연재]<레이디 버드> 익숙함을 그리워하게 될 때  대표 이미지
본 게재글은, 17-19세 청소년을 대상으로 진행한 한국영화박물관 교육 프로그램 ‘청소년을 위한 영화 글쓰기 키트’의 최종 과제입니다.

영화는 소설가 존 디디온의 한 문구로 시작한다. “캘리포니아의 쾌락주의를 논하는 자는 새크라멘토에서 크리스마스를 지내 봐야 한다.” 시작부터 이야기가 펼쳐질 곳이 얼마나 지루한 곳인지 알려주는 이 영화에는 모든 것을 지루해하는 여자애가 등장한다. 기찻길 옆 낡은 주택에서 엄마, 아빠, 오빠 그리고 오빠의 여자친구와 살고 있는 이 여자애의 이름은 ‘크리스틴’이다. 

그러나 영화를 보는 관객은 이 여자애의 이름이 ‘크리스틴’이라는 것을 잘 인지하지 못한다. 크리스틴이 자신을 ‘레이디 버드’라고 부를 것을 계속해서 강조하기 때문이다. 뮤지컬부 오디션에서 레이디 버드라는 이름에 왜 인용부호가 붙였냐는 질문에 “제가 스스로에게 지어준 이름이거든요. 저에게 제가 준 거예요.”라고 말하는 ‘레이디 버드’의 모습은 무척 당차지만 그 뒤 이어지는 노래와 댄스는 조금 우스꽝스럽다. 
 
그렇다. 레이디 버드는 사실 조금 우스꽝스럽다. 말과 행동은 왠지 과장되어 있고 튀는 행동만 골라서 하는 것 같다. 애초에 새 몸통에 자신의 얼굴을 붙인 포스터로 학생회장에 출마했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고급 주택이 자신의 집이라고 거짓말을 하는 장면이나 수녀 선생님 차 뒤에 “방금 예수님과 결혼했어요.”라는 푯말을 붙이는 종류의 장면들을 보다 보면 레이디 버드 혼자서 펼치는 1인 코미디쇼를 보는 것 같기도 하다. 

사실 이런 과장된 행동들은 레이디 버드가 ‘모든 것을 지루해 하는 여자애’인 것과 관련이 있다. 그건 영화의 초반 장면부터 확인할 수 있다. “재미있는 일이 생기면 좋겠어.” 대학 탐방을 갔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레이디 버드가 엄마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러자 엄마는 레이디 버드의 ‘의지 없음’을 지적하고 그것은 모녀 사이의 대화가 대게 그러하듯 곧 말싸움으로 번진다. 

레이디 버드는 결국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뛰어내린다. 이 장면은 우리의 주인공이 얼마나 발칙한 고등학생인지 보여준다. 엄마에게 지지 않기 위해 달리는 차에서 뛰어내릴 정도라니. 또한 이 장면은 레이디 버드는 지루함을 기꺼이 참아주는 캐릭터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화면이 전환되고 가톨릭 미사에 팔에 붕대를 감은 채 설렁설렁 임하는 주인공을 보며 우리는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다. 새크라멘토, 가톨릭 학교, 잔소리 하는 엄마 등 레이디 버드를 둘러싼 것들이 얼마나 지루한지 말이다. 

따라서 기본적으로 이 영화는 레이디 버드가 지루한 모든 것들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이야기이다. 뮤지컬 반에 들어가고 첫 연애를 하고 엄마 몰래 뉴욕에 있는 대학에 지원하는 과정들은 바로 레이디 버드의 ‘지루함’ 때문에 일어났다. 첫 남자친구를 사귀고 첫 섹스를 하고 베스트 프렌드 대신 잘나가는 새 친구를 사귀어보려는 시도들이 모두 여기에 포함된다. 그러나 영화는 여타의 성장 영화들처럼 도망침의 결말에 주목하지 않는다.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오히려 도망치는 과정이다. 

그 과정은 완벽하지 않고 실수투성이이다. 프롬 때 입을 드레스를 고르러 가서 엄마는 레이디 버드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네가 항상 완벽한 모습이기를 원했어.” 레이디 버드는 이렇게 대답한다. “이게 나의 완벽한 모습이라면?” 영화는 완벽하지 않은 십대를 탓하지 않는다. 오히려 완벽하지 않은 것이 당연하다고 이야기한다. 
 

성장의 과정에서 우리 모두는 미숙하다. 이 영화가 레이디 버드라는 캐릭터를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결국 이러한 성장의 속성이다. 크리스틴이 직접 지은 ‘레이디 버드’라는 예명도 꽤나 상징적이다. 실수투성이인 사랑스러운 주인공은 아직 알을 깨고 나오지 못한 데미안의 새 이미지라던가 날아오르기 연습을 하는 아기새의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영화가 다루는 불완전성은 엄마와 딸의 관계에서도 드러난다. 둘의 관계는 묘하다. 서로를 가장 증오하면서도 가장 사랑한다. 서로가 완벽한 존재이기를 원하지만 가장 불완전하다. 과장해서 말한다면 이 영화는 레이디 버드의 성장 영화이기 전에 모녀가 주인공인 영화이다. 둘의 이러한 기묘한 관계는 초반 자동차 장면에서부터 드러난다. 대학 탐방에서 돌아오던 날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를 들으며 감동의 눈물을 흘리다가도 곧바로 사소한 말다툼을 하는 관계. 구제 옷가게에서 티격태격하다가도 괜찮은 드레스를 발견하자 바로 표정과 말투가 밝아진다. 

앞서 영화가 크리스틴 혼자 펼치는 1인 코미디극 같은 느낌을 준다고 이야기했었다. 초반에 받았던 그 느낌은 후반으로 갈수록 옅어진다. 가장 큰 이유는 관객이 ‘레이디 버드’ 너머의 것들을 보게 되기 때문이다. 레이디 버드를 둘러싼 친구, 엄마, 아빠 등의 이름의 관계들, 누구나 인생에서 한 번쯤 경험할 만한 순간들이 그것이다. 이런 것들을 보다 보면 레이디 버드의 모습에 내 모습이 겹쳐 보이기 시작한다. 그만큼 이 영화에서 다루고 있는 이야기는 보편적인 우리의 이야기다. 진솔함을 느끼게 되는 데는 이 영화의 시선도 한 몫 한다. 이야기 전개를 화려하게 비틀고 이끌어 나간다기 보다는 어떤 관찰자가 그저 담담히 성장의 순간을 목격하는 것처럼 보인다. 때문에 후반부에서 영화는 1인 코미디극에서 진정성 있는 다큐멘터리로 변모한다.

끝까지 영화는 어떤 대단하거나 놀라운 순간을 통해 성장을 축복하려 하지 않는다. 완벽은 이 영화의 종착지가 아니다. 대신 새크라멘토의 풍경처럼 소박하고 천천히 그녀가 성장했음을 알린다. 첫 시퀀스에서 엄마와 딸의 대화 장면을 통해 영화가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압축적으로 보여줬던 것처럼 마지막 시퀀스에서도 레이디 버드에게 있어 ‘지루함’의 대상에서 ‘그리움’의 대상인 것들을 나열해 보여준다. 교회와 부모님, 새크라멘토 말이다. 

신입생 파티에서 술에 취해 깨어난 다음 날 아침, 레이디 버드는 뉴욕의 낯선 거리를 배회한다. 그러다 발길이 향한 곳은 그토록 지겨워했던 교회였다. 교회에서 나온 레이디 버드는 엄마, 아빠에게 전화를 건다. “엄마, 아빠, 저에요. 크리스틴.” 레이디 버드가 크리스틴이 되는 순간이다. 그녀는 아빠에게 양해를 구하고 엄마에게 할 말을 이어간다. “엄마도 새크라멘토 도로를 처음 달릴 때 감상에 젖었어? 말해주고 싶었어. 모든 건물들이 정겹게 느껴졌거든.” 그토록 벗어나고 싶어 했던 새크라멘토와 엄마에 대한 애정과 그리움이 드러난다. 익숙한 것에서 벗어나 비로소 그것을 그리워하게 될 때, 이것이 바로 영화에서 조명하는 성장의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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