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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영화 배급기

독립영화 배급기 대표 이미지

나는 덜컹거리는 좌석에 앉아있다. 새벽부터 감질나게 내리던 비가 차창 밖으로 흐르고 있는 것이 보인다. 창 밖으로는 처음 보지만 익숙한 시골 풍경이 그보다 빠른 속도로 흘러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 지금 나는 이 글을 지방 어딘가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쓰고 있다. 그리고 이 글을 마칠 때 즈음이면, 아마 추측하건대 나는 또 어딘가 다른 곳으로 향하고 있을 것이다. 단편 영화 배급이라는 것은 나에게 항상 이런 일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 심지어 독립영화계에 일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생소할 이 직업은, 내가 처음 일을 시작할 때에도 모호했지만, 곧 십오년 경력을 달성하게 되는 지금에 이르러서도 어떤 일인지 딱 정리하기엔 애매하다. 그래서 십여년 전부터 나는 이 직업을 인디아나 존스 같은 모험가라고, 맘대로 생각하기로 했다. 어딘가 이상한 합리화 같지만, 실제로 나는 이 생각이 꽤 그럴싸하다고 여겨왔다. 인디(이럴 수가 심지어 이름도 ‘인디’잖아!)의 직업은 대학교에서 재직하는 고고학자이다. 그의 일상은 학교의 연구실이나 도서관에서 수많은 책들 속에 파묻혀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그런데 그 일상의 다른 한편으론, 놀랍고 신기한 보물을 찾아 전세계를 누비는 모험의 삶 또한 존재한다.

단편 영화 배급이란 직업도 지루한 일상과 두근거리는 모험의 기묘한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업무 자체의 대부분은 온라인으로, 사무실의 모니터 앞에서 이루어진다. 그것은 수많은, 어떻게 보면 영원히 끝나지 않을 서류 작업의 시간들이다. 그리고 여기에 새로운 영화와 관객을 찾기 위해 세상을 누비는 모험의 시간이 항상 같이 따라 붙는다. 인디는 시리즈 몇 편에서인가 그런 말을 했었다. 고고학은 도서관의 책 속이 아닌, 바깥 세상에 존재한다고. 마찬가지다. 배급은 결코 서류에서 끝나지 않는다. 영화도, 창작자도, 관객도 그들 모두는 서류와 모니터 밖에 있는 현실 세계에 존재한다. 정말 좋아해서 배급을 하게 된 한 영화가 모니터 속 서류와 파일로만 존재하다가… 마침내 극장에서 관객들을 만나게 될 때- 관객들이 그 영화를 나처럼 좋아하게 되었다고 느끼게 되는 멋진 순간이 있다. 그것은 내가 이 일에서 가장 좋아하는 순간이다.

‘가장 좋아하는 순간이다’... 이 문장을 쓰고 있는 나는 이제, 경상도 해안 도시 어딘가의 한적한 카페에 앉아있다. 얼마 남지 않은 커피를 홀짝이며 방금 쓴 문장을 되뇌자, 나는 몇 개의 과거 속에 남아있는 행복한 감정을 떠올린다. 하지만 필연적으로 씁쓸한 기억의 흔적이 함께 어렴풋이 떠오른다.

얼마 전에, 몇 년 전부터 인연을 맺고 있는 한 감독의 새 단편 영화를 배급하게 되었다. 그는 유독 GV(관객과의 대화)에 집착을 하고 있었다. 영화를 보는 것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그는, 초청된 모든 영화제의 GV 시간을 꼼꼼하게 체크하고 또 체크했으며, 입고 갈 의상과 그 날의 질의응답을 거듭 준비하곤 했다. 나는 그의 열띤 모습이 좀 의아했다. 나는 그에게, 이전 영화로 이미 꽤 많은 GV를 하지 않았었냐고 물었다. 왜냐하면 그의 이전 영화는 그 해 가장 주목받고, 또 많은 영화제에 초청되었던 작품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대답을 들은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저는 그 영화로 GV를 거의 해 본 적이 없어요.”

그의 이전 작품은 2020년, 팬데믹 시대의 영화였다.

다른 많은 사람들이 나와 똑같은 느낌으로 팬데믹 시기를 기억할지 모르겠다. 굉장히 힘들었고 스트레스를 받았다는 어렴풋한 기억, 그리고 마치 꿈이라도 꾼 것처럼 그 기억은 점점 뿌옇게 흐려져가고 있다. 언젠가는 힘들었다는 추상적인 기억과 땀이 찬 마스크의 축축한, 기분 나쁜 감촉만이 기억 날지도 모르겠다. 팬데믹의 기억에 대한 이 이상한 감각은 단편 영화들이 겪었던 이상하고, 때론 의심스러웠던 수많은 일들의 기억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처음 팬데믹이 시작되었을 때, 아니 처음 나의 현실을 덮쳐 왔을 때가 기억난다. 나는 어딘가로 부지런히 걸어가고 있었다. 아마 어느 영화제 스태프들과 배급사 담당자들 간의 미팅 자리로 가는 길이었을 것이다. 그 무렵 뉴스의 해외 단신에 나오던 새로운 역병은, 조금씩 뉴스의 메인 꼭지로 다뤄지는 빈도가 높아져 가고 있었다. 그 날의 미팅도, 이 상황 속에서 어떻게 안전한 영화제를 진행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있을 예정이었다. 미팅 장소로 향하는 나는 조금 걱정스러웠지만, 한편으론 좋은 쪽으로 일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란 평소와 같은 열띤 흥분이 조금 더 강했다. 하지만 그 장소에 도착하기도 전에 나의 핸드폰으로 새로운 이메일과 동료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상영은 취소되었다. 영화제는 온라인으로 진행될 것이다. 그렇게 나의 일은 균형을 잃기 시작했다.

그 뒤에 내가 맞이한 세상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비대면”, “뉴노멀”. “새로운 세상이 온다”. “기존에 알던 우리의 세상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모두가 힘들었지만, 단편 영화들에 있어서는 유독 모진 시기였다. 이렇게 말하자면- 더 힘든 사람들, 더 끔찍한 일을 겪은 영역도 있다고 하겠지만... 바로 그것이 문제였다. 단편 영화는 “중요하지 않은 일”로 생각되었기 때문에 더 모질었다.

강력한 방역 조치와 거리 두기가 시행되자 그토록 많던 상영과 행사들은 빠른 속도로 사라져갔다. 그것들은 아주 간단하게 “온라인”으로 대체되었다. 수많은 영화제와 상영회들이 스트리밍 서비스를 통해 영화를 상영했다. 창작자들이 서로 만나 밤새 이야기를 나누던 시간은 ‘메타버스’의 이상하고 어색한 사교 활동으로 바뀌었다. 그 결정을 내린 사람들과 단체들이 가벼운 마음이 아니었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우리는 모두 그 결정들이 “변곡점"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을 뿐만 아니라, 어쩌면 ‘영원히’ 돌이킬 수 없을지도 몰랐다. 언젠가는 온라인 상영이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될 수도 있겠지. 미래에는 극장이 사라질지도 몰라. 분명 그런 생각은 팬데믹 이전에도 있어왔다. 하지만 그때 우리는 그런 변화에 대한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언젠가 올 것이라 생각했던 수많은 일들이 너무나 빨리 우리 앞에 현실로 닥쳐왔었다.

팬데믹 시대, 나의 일은 두배 세배의 모니터 앞 서류 작업으로 변질되었다. 일의 양도 피곤하고 힘들었지만, 무엇보다 견디기 힘든 것은 이 일에 ’모험’의 두근거림이 사라지고 끊임없이 ‘일상’만이 존재하게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아무리 많은 서류 작업을 하고 어떤 좋은 영화를 영화제에 진출시켜도, 나는 내 노력의 결과를 느낄 수 없었다. 그 시기 내가 배급했던 영화들은 많은 경우, 온라인 상영 결산 서류의 숫자가 되어 나에게 돌아왔다.

수많은 온라인 상영과 가상 공간에서의 행사들. 그것들은 오프라인에 있던 공간과 시간의 제약을 벗어난 새로운 기회인 것 같았다. (최소한 그렇게 포장했다) 하지만 실제 결과는 많이 달랐다. 조회수는 꽤 자주 처참했고, 아바타 대화는 종종 무의미했다. 그리고 불과 2년여의 시간이 지났다. 팬데믹의 공포가 옅어져 가고, 답답한 마스크를 더 이상 매일 쓰지 않아도 될만큼 시간이 지났다. 우리의 미래인 양 얘기했던 그 수많은 변화들은 “놀라울 만큼” 빠르게 사라져갔다. 영화제의 온라인 상영은 이제 단편 영화를 제외하곤 거의 하지 않는다. (사실 왜 단편영화들만 온라인 상영을 계속 하는지는 나의 소소한 의문이다) 혼란스러운 시대를 틈타 사람들을 현혹시켰던 NFT나 메타버스는 이제 사람들의 우스개소리로, 누군가의 실패한 주식 테마주로만 기억된다. 나도 이제 다시 도시에서 도시로, 산과 바다로 돌아다니며 새로운 영화와 관객을 찾는다. 나의 일은 다시 균형을 찾았다.

문제는, 사람들이 기억하지 못하는- 혹은 떠올리기 싫어하는 그 시기의 기억 속에, 어떤 것들은 남겨졌다는 것이다. 팬데믹 시대의 단편 영화와, 그 작품의 창작자들은 아직도 그 망각 속에 남아있다. 팬데믹 시기, 그들의 단편영화를 세상에 내놓았던 이들에게 나는 무척 안쓰럽고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든다. 누군가에게는 일생 일대의 기회였을 수도 있고, 또 누군가에게는 앞으로 영화를 계속 해나갈 응원일 수도 있었을 순간들을- 그들은 누리지 못했다. 그것은 그들의 노력과 성취에 응당 따라 왔어야 할 보상이었다. 나는 이 일을 하며 그런 보상들이, 그 크기와 화려함의 정도와는 별개로 사람들의 인생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여러 차례 봐왔다. 

나는 이제 이 글의 마지막 단락을 쓰며 또 다른 어딘가로 향하고 있다. 그곳에서 반가운 얼굴들을 꽤 만날 것이고, 운이 좋다면 새로운 인연도 만나게 될 것이다. 작은 상영관에 모여 앉은 관객들은 어쩌면 그들이 새로 좋아하게 될 어떤 영화를 찾을지도 모른다. GV에 집착하는 그 감독도 내일 있을 또다른 영화제 때문에 조금 상기된 모양이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번엔 꽤 신경 쓴 정장을 챙겨 둔 모양이다. 그는 다행히 새로운 영화를 만들었고, 두번째 기회를 잡아냈다. 나는 그의 행운이 정말 기쁘다. 하지만 팬데믹의 기억 속에, 누군가는 끝내 남겨져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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